정치권서 내년 1분기 조기 추경 편성 요구…정부는 신중
법상 추경요건 해당 안되고 효과는 불확실…국채 발행도 부담

정책팀 = 대통령 탄핵 등 정국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정치권이 다시 추가경정예산(추경) 카드를 빼들었다.

올해 편성된 추경 예산을 다 쓰지도 않았고, 내년 본예산은 단 1원도 집행되지 않았지만 정치권은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다.

정작 추경이 왜 필요한지, 법률상 추경 편성 요건에 해당하는지, 기대했던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 등의 진지한 고민은 온데간데 없다.

모두들 나랏돈을 풀자는 주장만 할 뿐 그 돈을 어떻게 마련하고 어떻게 갚을지는 신경쓰지 않고 있다.

연례행사처럼 되풀이되는 추경 편성 재원을 마련하느라 정부 빚은 차곡차곡 쌓이고 있다.

내 주머닛돈이 아니니 "일단 쓰고보자"는 목소리에 파묻혀 미래세대의 부담만 늘어나는 형국이다.

◇ 4분기 성장절벽 우려에 추경 조기편성론 제기

내년 초 추경 조기편성론이 제기된 것은 최근 한국 경제를 둘러싼 대내외 환경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올해 4분기 각종 지표는 경기 둔화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다.

10월 광공업생산은 삼성전자 갤럭시노트 7 단종 등의 영향으로 전월보다 1.7% 감소했고, 주택경기 하락의 여파로 건설투자 역시 0.8% 줄었다.

11월 수출이 1년 전보다 2.7% 늘어나며 3개월 만에 반등했지만 앞서 1년 반 넘도록 감소세가 지속된 만큼 완전한 회복세로 판단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제조업 취업자는 11월까지 5개월째 감소한데다 청년층 실업률은 8.2%까지 치솟는 등 고용시장에도 한파가 몰아닥치고 있다.

여기에 최근 미국의 기준금리 인상으로 국내 금융시장은 물론 실물경제 여파까지 우려되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이 경제전망을 통해 "내년에도 불확실성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추경을 편성해 적극적으로 경기에 대응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공식적으로 추경 논의에 불을 붙였다.

한국 경제의 4분기 성장률(전기 대비)이 0%까지 내려갈 수 있고, 최근 대통령 탄핵안 의결로 불거진 정국 혼란의 영향이 더해진다면 실질 성장률은 마이너스로까지 추락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이후 정치권이 호응에 나서면서 추경 논의는 가속화되는 모습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19일 비상경제대책회의에서 조선업 구조조정에 따른 실업대책 등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지금이라도 준비를 시작해 1분기에는 추경편성을 완료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여당인 새누리당도 지난 23일 당정협의에서 "예산 조기 집행만 갖고는 내년 경제 전망이 썩 희망적이지 않다"면서 "세수에 어느 정도 여유가 있고 경제는 타이밍이 중요한 만큼 추경도 내년 2월까지 편성해달라"고 정부에 요청했다.

때 이른 추경 논의에 나라 곳간을 관리하는 기획재정부는 당혹해 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사상 처음으로 내년 400조원 이상의 '슈퍼예산'을 편성해두고 아직 집행조차 시작되지 않은 상태에서 추경 요구 목소리가 커지는데 대해 예산 당국은 크게 부담을 느끼고 있다.

유일호 부 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22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에서 추경편성 의향을 묻자 "내년 1분기가 지나봐야 그걸(지표를) 보고 판단하려고 하고 있다"며 신중한 입장을 나타냈다.

◇ 국가재정법성 추경요건 해당 안돼…본예산 집행이 우선

현재 경기가 어렵다는데는 정치권은 물론 정부도 이견이 없다.

다만 경기가 어려운 것과 추경을 편성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 봐야 한다.

추경은 전년도에 마련한 예산을 불가피한 이유로 변경할 필요가 있을 때 '추가'로 편성하는 예산이다.

예외적인 상황에 한해 편성되는 만큼 그 조건도 까다롭다.

국가재정법은 추경 편성 요건으로 전쟁이나 대규모 자연재해 발생, 경기침체·대량실업·남북관계의 변화, 경제협력 등 대내외 여건의 중대한 변화, 법령에 따른 국가 지출 발생·증가 등으로 정하고 있다.

지난 7월 발표된 11조원 규모의 올해 추경은 조선 등 산업 구조조정에 따른 대량실업 우려 때문이었다.

지난해에는 세수 부족과 함께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에 따른 경기침체, 가뭄 피해를 지원하기 위해 11조6천억원 규모의 추경안이 마련됐다.

나름 국가재정법상 추경 요건에 부합했다.

그러나 정치권에서 요구하는 내년 1분기 추경의 경우 법상 추경 요건 어디에 해당하는지가 애매하다.

일각에서는 내년 성장률이 2%대 초반으로 떨어질 우려가 있는 만큼 1분기에 조기 추경을 편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우리 경제가 2012년 이후 2014년(3.3%) 한해를 제외하고는 계속 2%대 성장을 하고 있는 만큼 2%대 초반의 성장을 국가재정법상 추경 편성 요건인 경기침체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정부 관계자는 "이미 우리 경제의 잠재성장률이 3% 밑으로 떨어진 상황에서 2%대 성장을 경기침체로 보기는 어렵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경기둔화에 대응해 내년 예산 조기집행이 예정돼 있는 상황에서 엄청난 규모의 추경이 아니고서는 큰 효과를 보기 어렵다는 분석도 나온다.

400조원에 달하는 본예산을 제대로 쓰지 않은 상황에서 추경을 편성해봤자 실제 집행까지 시간이 걸리거나 아예 집행을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럴 바에는 내년 1분기까지의 경기를 보고 추경 편성 여부를 판단해도 늦지 않다는 것이 정부 입장이다.

실제 1분기 조기 추경 편성은 외환위기 당시인 1998년과 1999년, 금융위기 여파가 남아있던 2009년 등 세 차례뿐이다.

마이너스 성장이 우려되던 당시와 비교하면 2%대 성장이 전망되는 내년 1분기에 서둘러 추경을 편성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설명이다.

◇ 쏙 빠진 재원 논의…국가재정 악화일로 우려

더 큰 문제는 현재 추경 논의를 벌이는 정치권 어느 쪽에서도 재원 마련 방안에 대해서는 입 밖에 꺼내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추경 재원은 정부가 전년도에 쓰고 남은 세계잉여금을 활용하는 방법과 국채를 발행해 별도 재원을 마련하는 방법이 있다.

2009년 이후 정부는 추경을 편성할 때 주요 재원으로 국채를 활용했다.

필요한 돈을 마련하고자 정부가 빚을 진 것이다.

올해의 경우 세수 여건이 좋아 국채 발행 없이 세계잉여금과 초과세수를 활용해 총 11조원의 추경 재원을 마련했지만 이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한다.

현재로서는 내년 세수 여건이 올해처럼 계속해서 좋다고 장담할 수 없다.

따라서 추경 편성 재원은 국채 발행으로 마련해야 하는데 이 경우 재정 건전성은 훼손될 수밖에 없다.

정부에 따르면 지난해 중앙·지방정부와 비금융공기업의 빚을 더한 공공부문 부채(D3)는 1년 전보다 46조2천억원(9.0%) 증가한 1천3조5천억원이었다.

실질 경제성장률에 물가상승률을 반영한 경상 성장률은 3%대였지만 공공부문 부채는 경상 성장률보다 3배 빠른 속도로 불어난 것이다.

공공부문 부채가 늘어난 것은 정부가 경기 대응 실탄 마련을 위해 국채를 발행했기 때문이다.

특히 현 정부 들어 4개년 중 2014년만 빼고 빠짐없이 추경을 편성한 결과 공공부문 부채는 이 정부 들어서만 지난해까지 182조4천억원이나 불어났다.

공공부문 부채가 1천조원을 돌파한 것도 지난해가 처음이다.

내년까지 추경을 편성하면 현 정부 5년 중 4년, 거의 매해 추경을 편성하게 되는 셈이다.

불어난 공공부채는 줄이기 어렵고 그 부담이 궁극적으로는 국민 세금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추경 편성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작지 않은 상황이다.

◇ 전문가들 "상황 좀 더 지켜봐야…추경 잦으면 정책 효과 떨어져"

전문가들은 대부분 내년까지 우리 경제의 성장세가 회복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예측하면서도 추경 편성 여부는 상황을 좀 더 지켜본 뒤 판단해도 늦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내년 예산을 조기집행해 마중물 효과를 거둘 수 있는데다 내년 상반기에는 곳곳에 산재한 불확실성도 어느 정도 해소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근태 LG경제연구원 수석연구위원은 "경기 상황이 크게 위축되면 부양할 필요는 있다"면서도 "내년 재정 조기집행 계획도 나왔으니 그 효과를 지켜보는 것이 우선"이라고 밝혔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 역시 "지금 불확실성이 매우 크지만 내년 1월이 되면 미국 새 행정부가 출범하고 혼란스러운 국내 정치적 상황도 2월까지는 어느 정도 윤곽이 나올 것"이라며 "추경 여부는 그때 가서 판단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는 "어느 정도 확장적 재정정책을 위한 추경은 불가피한 것 같다"면서도 "당장 상반기에 (추경을) 집행할 이유는 뚜렷하게 없다"고 지적했다.

전 교수는 "정 안되면 예비비를 쓰고 재정 조기 집행률을 올리면 된다"고 설명했다.

추경 편성이 지나치게 잦으면 정책 효과가 오히려 떨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이 수석연구위원은 "매년 추경을 하다 보면 정책 효과는 떨어지고 국가 부채만 늘어날 수 있다"며 "추경 편성이 계속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전 교수는 내년 조기 대선을 가정한 뒤 "추경을 한다면 현 정부에서 할지, 새 정부에서 할지도 문제"라며 "특정 지역에 예산을 몰아주는 등의 위험 때문에 선거 전에 추경을 편성하지 않는 것이 나을 수 있다"고 말했다.

(세종=연합뉴스) pdhis959@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