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정의 시대' 온다…한은은 금융안정에 역점"
"정부 구조개혁 원활하게 추진되지 않아" 지적도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내년도 정부예산이 완화적이지 않다고 지적하며 정부가 부진한 경기부양을 위해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이는 통화정책을 책임지는 한은이 경기부양의 책임을 정부의 재정정책에 떠넘기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어 기획재정부와 한은 간 갈등과 논란이 예상된다.

이 총재는 21일 저녁 서울시 중구 한은 본관에서 출입기자들과 만찬 간담회를 하고 "정부 재정정책을 평가해보면 내년도 정부예산은 적어도 완화적이지 않다"며 그 근거로 예산의 총지출증가율과 명목성장률(실질성장률+물가상승률)의 차이를 제시했다.

이 총재는 "성장을 2%대로 잡고 물가(상승률)가 2%가 안 된다고 하더라도 4% 내외의 명목성장률이 되지 않겠느냐"며 "(예산의) 총지출증가율은 명목성장률에 비교할 때 낮다"고 말했다.

이어 "정부가 예상하는 총수입증가율에 비해서도 총지출증가율은 낮다"고 덧붙였다.

이 총재는 "국내 기관뿐 아니라 해외 신용평가사, 해외국제금융기관들도 한국의 가장 큰 장점으로 재정정책의 여력을 꼽는다"며 "재정정책이 더 많은 역할을 해야 할 때라는 주장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지난 3일 국회를 통과한 내년도 예산안의 정부 총지출 400조5천억원이 경기 부진에 대응하기에는 미흡하다는 지적이다.

나아가 이 총재는 "제로(0)금리, 양적완화, 그리고 심지어 마이너스(-) 금리로 대변되는 요란한 통화정책의 시대가 가고 이제 재정정책의 시대가 온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모하메드 엘 에리언 알리안츠 수석경제자문이 올해 1월 'The Only Game in Town'(마을의 유일한 게임)라는 책에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중앙은행의 고군분투를 강조했지만 이제 경제의 '볼거리'가 재정정책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금리 인상, 가계부채 급증 등으로 인해 한은이 기준금리를 추가 인하함으로써 경기부양에 나서기 어려워진 상황을 반영해 정부가 나서야 한다는 뜻을 에둘러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이 총재는 "통화정책의 여력이 소진됐다고 판단하지 않는다"는 원론적 답변은 반복했다.

이날 발언은 지난 16일 유일호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회동하고 정책협력을 강조한 지 불과 닷새 만에 나왔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유 부총리는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의 긴밀한 협조, 폴리시믹스(조합)가 중요하다"고 강조했지만, 통화정책에 신중을 기하려는 한은의 입장과는 온도 차가 분명해 보인다.

이 총재는 기자단과 만찬에서도 금융안정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이 총재는 "정책당국이 우선을 둬야 할 것은 뭐니뭐니해도 취약 부문의 리스크(위험) 관리"라며 "지금 한국은행은 거시경제, 금융안정에 대한 리스크 관리에 가장 역점을 두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정부의 노동, 금융, 공공, 교육 등 4대 구조개혁 정책에 대해서도 따끔한 지적을 했다.

이 총재는 "일부 부문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부문에서는 이해관계자 간 상충, 대내외 여건 등으로 원활히 추진되지 못한 상황"이라며 "앞으로 정부가 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이 총재는 "금년 한해는 정말 숨 가쁘게 지나온 것 같다"며 병신년(丙申年)을 마무리하는 소회를 밝혔다.

미국의 금리 인상과 중국 경제의 불안 등 이른바 'G2 리스크'와 일본의 마이너스 금리제도 도입 등 큰 사건이 끊이지 않았다며 예상이 완전히 빗나간 사례로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미국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을 꼽았다.

이 총재는 내년도 경제 전망과 관련해선 미국의 금리 인상 등 하방 위험이 크다며 "올해 4분기 성장 실적치를 모니터링한(점검한) 후 내년 1월에 전망치를 제시하겠다"고 밝혔다.

이 밖에 자신이 '비선실세'로 알려졌던 정윤회 씨와 강원도 정선군 인제면의 고향 선후배 사이라는 민주당 노웅래 의원의 의혹 제기에 대해 "한 번도 본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서울연합뉴스) 노재현 기자 noja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