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의 파격 인사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21일 파격적인 쇄신 인사를 단행했다. 지난해 8월 경영에 복귀한 뒤 최대 규모 인사일 뿐 아니라 1998년 그룹 회장 취임 이래 18년간을 통틀어서도 사상 최대폭 인사다.

그룹 내에서는 “최 회장이 10년간 SK를 이끌 진용을 짠 것 같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 회장의 신임이 두텁고 경영 능력을 검증받은 차세대 최고경영자(CEO)들이 그룹 경영 전면에 나섰다는 의미다. SK도 이번 인사에 대해 “변화와 혁신을 이끌 전문성과 실행력을 갖춘 인사를 발탁했다”고 밝혔다.

그룹 내에선 이번 인사의 키워드로 세 가지를 꼽는다. 세대교체, 미래준비, 성과중시다. 대다수 계열사의 성장이 정체된 상황에서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미래 성장동력을 찾아야 한다는 메시지다.

세대교체는 이번 인사의 최대 특징이다. 김창근 수펙스추구협의회(SK 최고 의사결정기구) 의장, 정철길 SK이노베이션 부회장, 김영태 수펙스 커뮤니케이션위원장 등 그룹 수뇌부 3인방이 용퇴했다. 이들은 모두 60대다.
최태원의 파격 인사
대신 그 자리를 50대가 채웠다. 새 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에 선임된 조대식 SK(주) 사장은 1960년생, 이노베이션 사령탑을 맡게 된 김준 SK에너지 사장은 1961년생이다. 이뿐 아니다. 박정호 신임 SK텔레콤 사장(53)과 장동현 SK(주) 사장(53), 박상규 SK네트웍스 사장(52) 등 주력 계열사 사장들은 50대 초반이다.

SK 내부에선 최 회장이 이미 지난 6월을 전후해 대규모 인사를 결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최 회장은 예정에 없던 확대경영회의를 소집해 16개 계열사 최고경영자(CEO)들에게 “변하지 않으면 돌연사할 수 있다”며 변화와 혁신을 부르짖었다. 이어 지난 10월 연례 CEO 세미나에서도 같은 메시지를 던졌다. 지난달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지며 조직 안정 차원에서 인사폭이 줄어들 것이란 관측이 돌기도 했다.

그러나 최 회장은 결국 원래 인사 쇄신안을 밀어붙였다. 이노베이션, 텔레콤 등 그룹 핵심 계열사 16곳 중 8곳의 CEO가 교체됐다. SK 내부에서조차 “깜짝 놀랄 만큼 큰 인사”라는 반응이 나올 정도였다.

이번 인사를 ‘친정체제’ 구축으로 볼 수 있는 측면도 있다. 최 회장과 가까운 CEO들이 요직을 맡았다는 점에서다. 조대식 수펙스 신임 의장은 최 회장과 동갑이면서 초등학교(이대부속초)와 대학(고려대) 동창이다. 사석에서 최 회장과 격의없이 말을 주고받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사이로 알려졌다. 박정호 신임 SK텔레콤 사장도 최 회장의 비서실장 출신으로 '오른팔'로 통한다.

하지만 단순히 친정체제라기보다 미래 사업을 고민한 결과라는 분석이 더 많다. 예컨대 박정호 사장은 SK(주) C&C 사장을 맡으면서 인공지능, 빅데이터, 클라우드, 스마트팩토리 등 이른바 4차 산업혁명 관련 사업을 주도했다. SK가 IBM의 인공지능인 왓슨을 국내에 도입하는 데도 주도적 역할을 했다. 박 사장이 이번 인사에서 SK텔레콤을 맡게 된 것은 휴대폰 사업의 성장 정체로 활력을 잃은 SK텔레콤을 혁신해야 한다는 최 회장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로 볼 수 있다.

SK 관계자는 “최 회장은 과거 정보기술(IT)의 상징이던 SK텔레콤이 IT업계에서 존재감을 잃어가고 있는 건 문제라고 생각한다”며 “C&C에서 강력한 실행력을 보여준 박정호 사장에게 ‘SK텔레콤도 한번 바꿔봐라’는 임무를 준 것”이라고 말했다.

조대식 수펙스 신임 의장도 마찬가지다. 조 사장은 원래 재무통으로 2007년 삼성에서 SK로 옮겨왔지만 바이오, 반도체 소재, 액화천연가스(LNG) 등 SK의 신성장 동력 발굴을 주도하며 사업 발굴에 뛰어난 전략통으로 거듭났다. SK(주) 자회사인 SK바이오팜 대표를 겸하고 있으며 SK머티리얼즈(옛 OCI머티리얼즈) 인수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수펙스 의장을 맡게 된 것도 최 회장이 이런 능력을 높이 산 결과라는 전언이다. 조 신임 의장이 이번에 신설된 수펙스 산하 전략위원장을 겸임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전략위원회는 그룹의 미래 사업을 발굴하고 실행하는 역할을 부여받았다.

성과중시 기조도 이번 인사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박성욱 SK하이닉스 사장과 조기행 SK건설 사장이 부회장으로 승진한 게 단적인 예다. 박 사장은 반도체 기술 경쟁력을 높이고 실적 개선을 이끌었다. 조 사장은 적자에 허덕이던 SK건설을 흑자로 돌려놨다. 성과가 있는 곳에 보상이 있다는 원칙이 적용된 것이다.

SK는 올해 164명의 임원을 승진자 명단에 올렸다. 지난해 137명보다 20% 늘어난 규모다. SK 측은 “올해 사상 최대 실적을 낸 하이닉스와 이노베이션에서 임원 승진자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주용석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