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수사·정권 입김서 자유롭지 않은 기업…"기업할 재미가 없다"
'수금창구'역할 전경련 해체론까지 대두


2016년은 기업인들에게 유독 수난이 많은 한해였다.

세계 경기 침체와 보호무역주의 강화 등 경제 환경도 시련이었지만, 국내에서는 정권과의 유착 등 의혹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권력을 대변해 기업들의 수금 창구 역할을 했다는 비난을 받는 전국경제인연합회는 해체의 갈림길에 섰다.

◇ "기업 할 재미가 없다"…세파 시달리는 기업

지난 7일 기자들과 만난 삼성그룹의 한 계열사 사장은 "기업 할 재미가 없다"고 말했다.

전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해 기업 총수 9명이 총출동한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청문회를 본 소회를 풀며 한 말이다.

총수들이 의원들로부터 "혼나는" 모습이 씁쓸했다는 소감이다.

이날 하루뿐 아니라 대기업들은 올해 여러 차례 검찰과 정치권으로부터 '호되게' 혼이 났다.

지난해 경영권 다툼으로 내홍을 겪었던 롯데그룹은 올해도 두 차례에 걸쳐 검찰수사를 받았다.

지난 6월 롯데는 신동빈 회장과 신격호 총괄회장의 비자금 조성 의혹을 겨냥한 검찰수사 선상에 올랐다.

그룹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는 정책본부와 주요 계열사가 대대적인 압수수색을 당했고, 이후 약 4개월 동안 500여명의 임직원이 검찰에 줄 소환됐다.

이 과정에서 신격호 총괄회장의 맏딸인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은 면세점 입점을 대가로 수십억의 뒷돈을 챙기고 회삿돈을 빼돌린 혐의로 구속됐다.

신 총괄회장과 신동빈 회장, 신동주 전 부회장 등 총수 일가와 임직원 24명은 횡령·배임 등의 혐의로 무더기 기소됐다.

하반기에 터진 '최순실 게이트'는 롯데뿐만 아니라 재계 전체를 집어삼켰다.

대통령이 대기업 총수들을 불러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에 돈을 내도록 강요하고, 총수들은 총 774억원을 출연했다는 게 의혹의 핵심이다.

경영권 승계를 위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삼성), 총수 특별 사면(CJ·SK), 검찰 수사 배려와 면세점 추가 승인(롯데) 등의 각 기업 현안과 맞물려 의혹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검찰 수사 과정에서 대통령이 현대차그룹에 최씨 지인의 회사와 납품계약을 맺도록 하고 최씨 소유의 광고대행사에 광고를 발주하라고 강요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포스코그룹은 펜싱팀을 창단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2013년 조원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이 CJ에 이미경 부회장의 퇴진을 직접 압박한 사실도 뒤늦게 알려졌다.

명확한 이유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 부회장이 야당을 두둔하고 여당을 비판하는 듯한 내용의 방송 프로그램과 영화를 제작, 배급해 정부 눈 밖에 났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미르·K스포츠 재단 외에 개별적으로 최씨 일가에게 특혜를 제공했다는 의혹을 받는 삼성은 그룹의 핵심인 미래전략실이 두 번이나 검찰 압수수색을 당했다.

다른 기업들의 총수들이 검찰에 줄줄이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특검 수사가 진행 중인 상황에서 기업들은 의혹을 완전히 털어내지 못한 채 인사 시기를 정하지 못하거나 경영계획 수립을 미루는 등 경영활동에 전념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 세대넘어 반복된 정권유착 잔혹사…'수금창구' 전경련 해체 갈림길

6일 열린 국회 청문회는 기업이 처한 현실을 단적으로 모여줬다.

좀처럼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기업 총수들이 대거 출석해 '송구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외신들은 "보기 드문 광경"이라며 정치인과 재벌 간의 '은밀한 관계'를 지적했다.

정치 스캔들로 경제 위기가 심해질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정작 국민에게 그 풍경이 낯설지 않았던 것은 28년 전의 재현이었기 때문이다.

1988년 '5공비리' 청문회 당시 삼성 이건희 회장, 선경(SK) 최종현 회장, 롯데 신격호 회장, 현대 정주영 회장, 럭키금성(LG) 구자경 회장, 한진 조중훈 회장 등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그리고 그들의 아들이 같은 자리에 앉았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정권이 주도해 설립한 재단에 거액을 출연한 이유에서였다.

그때도 지금도 권력과 재벌의 '잘못된 만남을 잇는 전경련이었다.

전경련은 대기업한테서 돈을 걷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기업들이 미르·K스포츠재단에 자발적으로 출연한 것이라던 이승철 전경련 부회장은 청문회에서 "청와대에서 세세한 부분을 관여했다"고 말을 바꿨다.

1961년 설립된 전경련은 경제 성장기에 재계의 입장을 대변하며 산업 발전을 이끌었다는 평가도 있지만, 재벌들의 입장만을 대변하고 정경유착의 온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일해재단 자금, 1995년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의 대선 비자금 모금, 1997년 세풍 사건, 2002년 불법 대선자금 의혹 등에도 연루됐다.

2011년에는 주요 회원사들에 로비 대상 정치인을 할당하는 문건이 폭로된 바 있다.

올해 초에는 보수단체인 어버이연합과 탈북자 단체를 우회 지원했다는 의혹까지 제기됐다.

삼성, SK, LG 등의 총수는 청문회에서 공개적으로 탈퇴 의사를 밝혔다.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기업은행 등 금융기관들도 잇따라 탈퇴 절차를 밟았다.

전경련의 연간 운영 예산은 약 400억원. 삼성 등 5대 그룹이 내는 회비가 절반을 차지한다.

전경련은 쇄신안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지만, 이참에 전격 해체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경제개혁연대는 "정경유착의 산물로 태어나 재벌의 기득권을 옹호하며 공정한 시장경제 발전의 장애물이 돼 왔고, 이제는 부패한 정권의 심부름꾼으로 전락해 회원사들로부터도 외면을 당하는 전경련은 해체 말고는 답이 없다"고 촉구했다.

전경련은 헤리티지재단처럼 싱크탱크 등으로 조직을 탈바꿈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내년 2월 정기총회에서 존폐를 결정할 예정이다.

(서울연합뉴스) 고유선 김연숙 기자 nomad@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