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덫'에 걸린 기업들
“기업들이 정치의 덫에 단단히 걸려든 것 같습니다.”

지난 9일 국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을 지켜보던 한 대기업 임원이 기자에게 던진 말이다. 기업들이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매몰돼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을 토로한 듯 보였다. 기업들은 올해 말부터 내년 상반기까지 ‘검찰 수사→국회 국정조사 청문회→특별검사 조사→탄핵 정국→대선 정국’ 등 정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국회와 청와대, 특검, 헌법재판소만 쳐다보며 시간을 보내야 할 판이다. 투자계획 수립과 글로벌 마케팅 등 본업(本業)은 뒤로 밀리게 생겼다.

기업들이 최순실 사태에 엮인 대가는 점점 커지고 있다. 작년 7월 이후 박 대통령과 독대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기업 총수 9명은 이미 검찰 수사를 받았다. 검찰이 “기업들은 대부분 불이익이 두려워 (미르·K스포츠재단) 출연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고 밝혔지만, ‘대통령 뇌물죄’까지 겨누면서 기업들은 무차별적 압수수색도 받았다. 이달 6일엔 국회 국정조사 청문회에 기업 총수 9명이 모두 불려나가 보여주기식 ‘정치 쇼’에 들러리까지 섰다.

‘정치의 덫’은 점점 더 조여지는 모양새다. 당장 이번주부터 특검 수사가 본격화한다. 2003년 SK글로벌 분식회계 사건을 수사하며 ‘재계의 저승사자’로 불린 박영수 특검이 박 대통령의 뇌물죄를 입증하기 위해 고강도 기업 수사를 벌일 것이란 예상이 많다. 여기다 기업인들이 헌법재판소까지 불려나갈 가능성도 꽤 있다. 재판부가 기업인을 소환해 심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면 기업인들이 불응하긴 어렵다.

한 10대 그룹 임원은 “내년 초까지 특검의 기업 총수 소환과 압수수색, 헌법재판소 소환까지 줄줄이 이어질 것 같다”며 “기업 총수들이 마음놓고 해외 출장이라도 갈 수 있겠느냐”고 하소연했다.

재계는 탄핵 정국 이후가 더 문제라고 보고 있다. 곧바로 대선 정국이 이어지는 탓이다. 야권 후보들이 상법 개정안을 비롯해 공정거래위원회의 전속고발권 폐지를 골자로 한 공정거래 관련 법률 개정안 등 경제민주화 법안을 줄줄이 대선 공약으로 내놓을 공산이 클 것으로 재계는 우려하고 있다.

한 경제단체 임원은 “글로벌 기업들과 전쟁을 벌여야 할 한국 기업은 내년 상반기까지 정치권만 바라보며 주저앉아 있게 생겼다”며 “내년 하반기 예상치 못한 후폭풍이 닥칠 수도 있다”고 걱정했다. 기업들이 ‘정치의 덫’에 걸려 허우적댄 대가가 생각보다 클 수 있다는 얘기로 들렸다.

장창민 산업부 기자 cm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