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공무원으로 산다는 건] 러시아로 남미로 '시장개척' 바쁜데…트럼프 당선에 "FTA 재협상?" 멘붕
지난달 9일 낮 12시께 세종시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실. 미국 대통령 선거 개표 상황을 생중계하는 TV 앞으로 공무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화면에 ‘트럼프 당선 확실’이란 문구가 뜨자 “당분간 집에 들어가긴 글렀다”는 탄식이 여기저기에서 쏟아졌다.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의 승리로 가장 곤혹스러워한 공무원은 통상 관련 부서 관계자들이다. 트럼프 당선자가 선거기간 내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미국 내 일자리를 죽이는 협정” “모든 무역협정을 재협상하거나 폐기하겠다” “세계무역기구(WTO) 탈퇴도 가능하다” 등 통상 공무원으로선 ‘악몽’에 가까운 공약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A과장은 “지금도 중남미부터 러시아까지 ‘세계 일주’를 하고 있는데 트럼프 덕분에 집에 못 들어가는 날이 더 늘게 생겼다”고 말했다.

◆한 달 동안 4개 대륙 출장

산업부의 통상 관련 부서에서는 9개 FTA 관련 업무가 일상적으로 돌아가고 있다. 한국과 양자 FTA 협상을 벌이고 있는 중미 6개국(온두라스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코스타리카 파나마 과테말라) 및 에콰도르 이스라엘과 관련된 업무, 다자간 FTA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한·중·일 FTA와 관련된 업무 등이다. 이미 FTA를 맺었지만 개선 협상이 필요한 칠레 인도 아세안과 관련된 업무도 추진 중이다.

170명에 달하는 공무원이 해당 업무를 맡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적은 숫자가 아니지만 세계 각국으로 출장을 다녀야 하기 때문에 세종시 사무실에는 빈자리가 더 많다.

통상교섭실 공무원들이 지난달 다녀온 출장지는 4개 대륙에 걸쳐 있다. 필리핀을 시작으로 둘째 주에는 러시아, 셋째 주에는 니카라과, 넷째 주에는 뉴질랜드를 방문했다. B과장은 “남미 등 거리가 먼 나라로 출장을 가면 세 번의 주말이 없어지는 셈”이라며 “아이들이 아빠 얼굴을 잊어버릴까 봐 걱정된다”고 했다.

또 다른 공무원은 “나랏돈으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니 부럽다고 말하는 눈치없는 친구들도 있다”며 “정작 그 나라에 가선 업무만 보고 바로 와야 하기 때문에 관광 등을 할 여유는 전혀 없다”고 말했다.

◆과중한 업무에 이탈자 늘어

가뜩이나 바쁜 통상 공무원들에게 트럼프 당선은 ‘울고 싶은데 뺨 때린 격’이다. 트럼프 당선자가 한·미 FTA 폐기를 요구할지, 부분 재협상을 요구할지 등을 두고 시나리오별 대응방안을 마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산업부 고위 관계자는 “트럼프 당선자와의 네트워크가 거의 없어 난감하다”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 불확실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결정도 통상 관련 부서에는 발등의 불이다. 한국은 유럽연합(EU)과 FTA를 맺고 있어 EU 일원이었던 영국과 따로 FTA를 체결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영국과 FTA 협상을 해야 하는 것은 물론 영국이 EU 회원국임을 감안해 맺은 한·EU FTA도 개정해야 한다.

통상 분야 공무원은 외국어 실력 등 진입장벽이 높음에도 공무원 사이에선 선망의 대상이다. 해외를 누비며 국익을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업무량 때문에 이탈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올 들어서도 몇몇 통상 공무원이 방위사업청 원자력안전위원회 국방부 등 서울에 있는 부처로 자원해 빠져나갔다.

이태훈 기자 bej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