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이 비상경영 체제에 들어갔다. 최태원 SK 회장의 입에선 ‘워룸(war room)’이란 말까지 튀어나왔다. 지난 12~14일 경기 이천시 SKMS연구소에서 계열사 사장단, 고위임원 등 40여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연례 최고경영자(CEO) 세미나에서다. 최 회장은 당시 “변화와 도전을 심도있게 해야 한다”며 “(비상 상황이니) 회사마다 워룸 설치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워룸은 전시 작전지휘부다. 군 통수권자와 핵심 참모 등이 모여 전황을 한눈에 파악하고 작전을 짜는 곳이다. 기업 경영으로 치면 비상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종합상황실’이다.
SK 비상경영…'워룸'까지 언급한 최태원
주력 계열사 중 한 곳인 SK하이닉스는 이미 행동에 들어갔다. 지난달부터 CEO 직속으로 전사 혁신 태스크포스(TF)를 설치해 가동하고 있다. 일종의 워룸이다. 여기에는 기술 개발, 제조 등 각 분야 임원, 팀장, 핵심 실무자들이 들어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기회의는 물론 수시로 회의를 하고 논의 사항을 CEO에게 직접 보고한다.

하이닉스는 최 회장이 변화와 혁신의 필요성을 가장 크게 느끼는 계열사 중 한 곳이다. 지난 6월 하이닉스 본사가 있는 경기 이천에서 하이닉스 고위임원 50명을 1 대 1로 불러 면담했을 정도다. 최 회장은 임원들에게 조직, 기술 개발 등에서 회사의 잘못된 점과 개선 방안을 집중적으로 물은 것으로 전해졌다. 50명은 하이닉스 전체 임원 150여명의 3분의 1이다. 최 회장은 당시 하이닉스 근처에 있는 SKMS연구소에 살다시피 하며 임원들에게 근본적 쇄신안을 주문했다.

다른 계열사들도 CEO 세미나 후속 조치를 검토하고 있다. SK텔레콤은 경영전략을 점검하는 TF 설치를 고민하고 있다. TF가 설치되면 7월 CJ헬로비전 인수 무산에 따른 미디어 플랫폼 사업 방향 재조정, 사물인터넷(IoT) 등 통신융합 신사업 전략을 논의할 가능성이 크다. SK이노베이션도 관련 대책을 검토하고 있다. 각 부문 책임자가 모여 문제 해결을 위한 솔루션을 도출하는 방안이 유력하다. SK(주) C&C 부문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1년6개월가량 워룸을 운영한 경험이 있다. C&C 부문 관계자는 “당시 외부 상황이 급변했기 때문에 빠른 보고 체계와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 워룸을 설치했다”고 설명했다.

지금은 그때보다 상황이 더 심각하다. 당시는 순전히 외부 환경이 문제였다. 하지만 지금은 내부 문제가 크다. SK 계열사 대부분이 성장 정체에 빠졌고 자산도 비효율적으로 운용되고 있다. 대부분 계열사는 주가순자산비율(PBR)이 1배에도 못 미칠 만큼 시장에서 외면받고 있다.

최 회장이 6월 말 확대경영회의에서 “변하지 않으면 서든 데스(sudden death·돌연사)할 수 있다”고 경고한 이유다. 최 회장은 당시 “지금이 전쟁 상태라면 용납이 안 되는 상황”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최 회장의 이번 워룸 발언도 이 연장선에 있다.

SK 계열사들은 연말 CEO, 임원 인사를 앞두고 있어 아직 구체적인 조직 개편에는 조심스러운 분위기다. 하지만 연말 인사가 마무리되고 나면 각 사에서 비상경영 체제가 구체화될 가능성이 크다. SK 관계자는 “최 회장이 말한 워룸은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각 사의 재무, 인사, 연구개발 등 주요 부문 책임자가 모여 회사의 강점과 약점을 되짚어보고 전략 방향을 잘 설정하라는 뜻으로 안다”며 “연말이나 내년부터 그에 상응하는 움직임이 본격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주용석/이정호/이호기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