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일호 부총리·이주열 한은총재 미국서 재정·금리 두고 신경전
정부·한은 경기보완책 놓고 '총대 떠넘기기' 논란


2016년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WB) 연차총회 참석차 미국을 방문 중인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정책 여력을 두고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재정 역할을 강조한 이 총재의 발언이 나온 뒤 유 부총리가 '기준금리의 여력'을 언급하면서 정부와 한국은행이 경기보완책의 '총대'를 서로 떠넘기는 모양새다.

이 같은 입장차는 이미 금리 인하, 재정보강 등 '마른 수건까지 쥐어짠 상황'에서 경기 회복을 위한 정책적 수단이 고갈되고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 정부의 '금리 여력' 발언…'금리 인하 압박' vs '단순 논리에 따른 것'

유 부총리는 8일(현지시간) 블룸버그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나라는 기준금리가 1.25% 수준인 상태라 아직 '룸'이 있다고 말했다.

유 부총리는 "확장적 통화정책을 펴왔고 거기에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한다"면서도 '거꾸로 본다면' 국내 금리는 아직 여유가 있는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의 금리인상 가능성에 대해서도 "(금리 인상이) 1회 정도에 그친다면 한국은 (그 영향을) 통화정책으로 충분히 흡수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유 부총리의 이 같은 발언은 오는 13일 예정된 금융통화위원회를 앞두고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그 배경이 관심을 끌고 있다.

한국은행은 금통위에서 기준금리를 결정하고 올해와 내년 성장률 전망을 수정 발표할 예정이다.

현재로써는 미국의 금리 인상이 임박한 것으로 알려진 데다 가계부채 급증의 위험성이 부각되면서 기준금리 동결 가능성이 큰 상황이다.

금통위를 일주일 앞둔 시점에서 나온 유 부총리의 '기준금리의 여력' 발언은 비록 '단순 논리에 따른 것'이라는 조건을 달긴 했지만 통화 당국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대목이다.

특히 정부가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에 이어 지난 6일 다시 10조원 규모의 정책패키지 카드를 꺼내 든 직후 나온 경제부문 수장의 발언이라는 점에서 가볍게 흘리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유 부총리의 발언에는 4분기 하방 위험이 산재한 상황에서 성장률 2.8% 달성을 위해 재정정책과 함께 통화정책도 병행돼야 한다는 정부의 '희망 사항'이 담긴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하지만 기재부는 유 부총리의 발언에 대해 '단순 논리에 근거한 발언'이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하고 있다.

미국 등 선진국의 금리가 '제로' 수준에 근접해 있는 반면 국내 금리는 아직 이보다 다소 높은 수준이라는 점을 언급한 것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것이다.

유 부총리의 발언은 확장적 재정정책을 강조하는 IMF/WB 연차총회의 분위기와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는 분석도 있다.

한국을 '콕' 집어 재정확대를 주문하는 현지 분위기에 부담을 느낀 정부가 '한국은 제로금리를 유지하는 선진국과 상황이 다르다'는 점을 해외 언론을 통해 어필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크리스틴 라가르드 IMF 총재는 지난 6일(현지시간) IMF/WB 연차총회 개회식에서 기자들과 만나 "몇몇 국가들은 재정적 여력이 있고 이를 사용해야 한다"며 "이 같은 나라로 한국, 독일, 캐나다 등을 꼽고 있다"고 말했다.

호세 앙헬 구리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사무총장도 지난 6일(현지시간)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 업무만찬에서 한국의 재정정책 확대 필요성을 언급했다.

◇ 재정이냐 통화냐…정부·한은 또 충돌하나

유 부총리의 '기준금리 여력' 발언은 같은 날 이 총재의 '재정정책 강조' 발언과 대비를 이루면서 정부와 한은 간 갈등으로 비화하는 것 아니냐는 전망도 나온다.

두 수장의 발언 요지만 놓고 보면 국내 경기불황이 장기간 계속되면서 해법을 놓고 머리를 맞대야 할 재정당국과 통화당국이 서로 '총대'를 떠넘기는 모양새다.

이 총재는 같은 날 오전 워싱턴의 한 식당에서 기자들과 만나 국내 통화정책은 이미 충분히 완화적이며 "금융안정 리스크를 고려할 때 통화정책을 쓸 수 있는 여력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 경제는 소규모 개방경제인 탓에 국제 금융시장의 상황에 따라 자금이동·환율 변동성이 크다"며 "금융안정 리스크가 많이 퍼져 있어 (통화정책의 추가 완화는) 조심스럽다"고 설명했다.

이 총재는 선진국의 금리보다 국내 기준금리가 상대적으로 낮다는 지적에 대해 "선진국이 제로금리까지 간 것은 경기 침체가 워낙 심했기 때문"이라며 한국의 기준금리와 단순 비교해선 안 된다는 뜻을 피력했다.

이 총재의 이 같은 입장은 당장 추가 금리 인하는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이 총재는 지난 8월 금통위에서 기준금리를 1.25%에서 동결한 뒤 기자간담회에서 기준금리가 실효 하한에 근접했다며 "제로금리나 양적 완화를 검토할 단계는 아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 총재는 오히려 "정부가 재정정책을 확장적으로 하려고 노력은 했지만 결과적으로 우리의 재정 건전성은 세계적으로 톱클래스"라며 아직은 통화정책보다 재정정책이 상대적으로 더 여유가 있다고 봤다.

특히 중앙은행 차원에서 저출산·고령화 문제에 대한 연구 계획을 밝히며 정부의 정책적 대응을 압박하는 모양새를 취하기도 했다.

같은 날 경제정책 수장이 기준금리의 여력을, 통화당국의 수장은 재정정책의 중요성강조하며 서로 '남의 다리만 매만지는' 상황이 연출된 셈이다.

이는 그만큼 국내 경제위기 상황이 엄중하다는 것을 반영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추경에 이은 재정보강, 금리 인하 등 동원 가능한 재정·통화정책을 최대한 끌어쓴 상황에서 어느 쪽이든 추가로 보완책을 내놓기 쉽지 않은 상황이 반영됐다는 것이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지난 6월 기업 구조조정 재원 마련 방안을 놓고 발권력 동원 여부 등을 놓고 갈등을 벌인 바 있다.

유 부총리와 이 총재는 함께 IMF/WB 연차총회에 참석 중이지만 현지에서 별도로 만날 계획은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워싱턴연합뉴스) 민경락 기자 roc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