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키아처럼 스마트폰 개발 포기하고 소프트웨어 집중키로
깜짝 성공했지만 기술 경쟁 등한시하다 아이폰에 밀려

이동하면서 이메일을 사용할 수 있어 2000년대 접어들 무렵부터 선풍을 일으켰던 블랙베리(BlackBerry).

초기에는 롤렉스 시계나 몽블랑 만년필처럼 기업인들의 신분을 상징하기도 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7년 반 전 취임할 때 백악관에서도 계속 블랙베리를 쓰려고 경호원들과 싸운 것은 유명한 일이다.

그러나 아이폰의 등장으로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블랙베리는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블랙베리가 28일(현지시간) 스마트폰을 더는 만들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은 그다지 놀랍지 않은 일로 받아들여진다.

잭도 리서치의 애널리스트 존 도슨은 "블랙베리가 여전히 전화기를 만들고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도 많다"고 IT 매체 와이어드에 말했다.

블랙베리의 휴대전화 판매는 2011년 5천230만대로 정점을 찍었지만 가장 최근 회계연도에는 320만대에 그쳤다.

블룸버그 인텔리전스의 애널리스트 매튜 캔터먼은 "수익성을 유지할만한 판매량이 아니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 불가피했다"고 말했다.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블랙베리는 1984년 캐나다 온타리오 워털루에서 마이크 라자리디스와 더글러스 프레긴 등 2명의 공학도가 리서치인모션(RIM)이라는 이름으로 설립했다.

이 회사는 1990년대에 POS 단말기를 만들었으며 1996년에 메시지를 받고 쓸 수 있는 인터랙티브 페이저 900을 내놨다
1998년에는 이메일 사용에 적합한 휴대용 기기 블랙베리 850을 출시했다.

이 회사를 유명하게 만든 이른바 'Qwerty' 자판을 탑재한 제품이었다.

이 작은 키보드의 버튼이 검은나무딸기의 소핵과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블랙베리라는 제품명이 처음으로 붙었다.

주머니 속에 이메일을 넣고 쓰는 것 같은 편리함 때문에 RIM은 전자시장의 주요 플레이어로 우뚝 섰다.

나중에는 엄지로 움직이는 휠이 탑재되고 스크린은 커졌으며 전화 기능이 추가됐다.

블랙베리는 불안정한 데이터 네트워크에서 대역폭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신기술을 고안한 덕분에 초기 성공을 거뒀다.

키보드는 또 다른 히트 요인이었다.

2002년에 나온 블랙베리 6210은 기업인뿐만 아니라 일반 소비자도 꼭 가지고 싶은 물건이 됐다.

블랙베리는 높은 인기 때문에 '크랙베리'(CrackBerry)라는 별명도 얻었다.

이 회사 제품은 10대들 사이에서 메시지 서비스로 인기를 끌기도 했다.

하지만 영광은 길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성공은 오히려 독이 됐다.

블랙베리는 급증하는 수요를 맞추는 데 급급해 기술 개발 마라톤에 집중하지 못했고 실리콘밸리의 경쟁자들에 눈길을 두지 않다가 금세 추월을 허용하고 말았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적했다.

블랙베리 공동창업자 라자리디스는 2007년 여름 처음 아이폰이 나왔을 때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는 "유리 위에 타이핑하기가 어렵다"고 평했지만, 아이폰을 뜯어보고 나서 회사 안에서는 충격받았다고 말했다.

애플은 미국에서 AT&T와 독점 계약해 이 통신업체가 네트워크를 업그레이드할 동기를 부여했다.

아이폰 이용자들은 초기에는 통화가 끊긴다고 호소하기도 했지만, 통신망 개선 덕분에 나중에는 '앵그리버드' 같은 게임 앱을 내려받아 즐길 수 있게 됐다.

이는 블랙베리가 엄두도 내지 못한 것이다.

블랙베리가 아이폰에 대항해 내놓은 제품은 오류투성이에 성능이 떨어졌다.

2008년부터는 구글의 안드로이드 운영체제를 탑재한 스마트폰이 나오기 시작했다.

삼성전자 같은 라이벌은 블랙베리의 점유율을 빠르게 잠식했다.

블랙베리는 오랜 지연 끝에 새 운영체제 블랙베리 10을 2013년 초에 내놨지만 이미 아이폰과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이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때라 소비자와 앱 개발자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블랙베리가 RIM에서 사명을 블랙베리로 아예 바꾼 것도 이 무렵이다.

블랙베리는 설계와 스프레드시트 작업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패스포트라는 제품도 내놓고 안드로이드 기반 스마트폰도 지난해 출시했지만, 때는 너무 늦었다.

블랙베리의 시장 점유율은 한때 운영체제 기준으로 20%에 달했다.

하지만 가트너에 따르면 블랙베리 OS 기반 휴대전화는 올해 2분기 시장 점유율이 0.1%에 불과하다.

블랙베리는 최근 몇 년 사이 수천명을 해고하고 일부 운영센터를 폐쇄했다.

라자리디스는 블랙베리 전화기가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몇 년 전 깨달았다.

WSJ에 따르면 그는 너무 걱정스러운 나머지 2013년에 회사 근처의 전자제품 매장에 있던 블랙베리 제품을 몽땅 사놓기도 했다.

하지만 블랙베리 이름을 단 휴대전화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블랙베리는 설계와 제조를 중단하지만, 인도네시아에 있는 회사가 라이선스료와 로열티를 내고 제품을 생산한다.

블랙베리는 이 제품을 인도네시아 이외 지역에서 재판매할 수 있는 옵션을 행사하지 않기로 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이 신문은 블랙베리의 하드웨어 포기로 매출 감소라는 중대한 문제가 더 커지게 됐다고 지적했다.

휴대전화는 8월말 끝난 2분기 매출에서 30%를 차지했다.

소프트웨어 부문의 성장에도 전체 매출은 2분기 3억3천400만 달러로 작년 동기(4억9천만 달러)보다 감소했다.

블랙베리는 소프트웨어와 무선기기 보안 사업에 집중할 계획이다.

스마트폰이 도래하기 전에 휴대전화 1위를 달리다 소프트웨어 사업으로 방향을 튼 노키아와 같은 길을 걷는 셈이다.

노키아 휴대전화는 마이크로소프트에 넘어가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김윤구 기자 kimy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