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중공업 'RG 급구' 요청에 서로 눈치만 보는 은행들
KEB하나은행과 농협은행 등 현대중공업 채권은행들은 현대중공업이 신규 수주한 유조선에 대한 선수금 지급보증(RG)을 누가 할 것인지를 놓고 서로 책임을 떠넘기는 ‘핑퐁 게임’을 계속하고 있다. RG는 조선사가 주문받은 배를 발주처에 인도하지 못할 때를 대비해 금융회사가 수수료를 받고 선수금을 대신 물어주겠다고 보증하는 것을 말한다.

16일 금융권에 따르면 현대중공업 채권은행들은 한 달 넘게 현대중공업의 신규 선박 수주에 대한 RG 발급을 둘러싸고 다툼을 이어가고 있다. 현대중공업이 그리스 선사 알미탱커스로부터 수주해 이달 초 계약한 2000여억원 규모의 31만7000t급 유조선 두 척은 RG 발급이 계속 지연되면 계약이 취소될 수 있다.
현대중공업 'RG 급구' 요청에 서로 눈치만 보는 은행들
KEB하나은행은 지난 6월 현대중공업이 다른 수주계약을 들고 와 RG 발급을 요청했을 때 한국수출입은행과 함께 보증서를 발급했다.

당시에도 지원 여부를 놓고 진통을 겪었으나 금융당국이 압박하자 주채권은행인 KEB하나은행과 국책은행이 총대를 멨다. KEB하나은행은 농협은행, 신한은행, 우리은행, 국민은행 여신담당자와 만나 앞으로 현대중공업에 대한 RG 발급에 동참해달라고 요청했다.

은행들은 원칙적으로 동의했지만 RG 발급 순서를 둘러싸고 새로운 다툼이 벌어졌다. KEB하나은행은 최근 조선업 여신 회수를 많이 한 순서대로 RG를 발급해야 한다며 농협은행을 발급 대상으로 지목했다.

농협은행은 STX조선 등 조선업 여신 부실로 올 상반기 3290억원의 적자를 낸 상황에서 신규 지급보증은 어렵다고 반발하고 나섰다.

농협은행 관계자는 “여신 관리를 잘못해 큰 손실을 보고 뒤늦게 축소하고 있는데 이를 근거로 RG를 맡으라는 것은 부당하다”며 “이번 지급보증은 주채권은행이 맡거나 조선업 여신이 적은 은행부터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농협은행은 지난해 말 8조9000억원 규모에 달했던 조선·해운업 여신을 6조2000억원(6월 기준)까지 줄였지만 우리은행을 제외하면 여신 규모가 가장 크다.

다른 시중은행은 불똥이 튈까 한 발 물러섰다. 시중은행 여신담당 임원은 “KEB하나은행과 농협은행의 합의가 잘 이뤄질 것으로 기대한다”며 말을 아꼈다.

국책은행들도 KEB하나은행과 농협은행의 다툼을 관망하고 있다. 수출입은행과 산업은행은 한때 국내 조선업계 RG의 절반 이상을 책임졌지만 지금은 시중은행 틈에서 눈치를 살피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을 지원하느라 다른 기업까지 지원할 여력이 없다는 이유에서다.

RG 발급이 지연되면서 조선사들은 속을 끓이고 있다. 조선업체 관계자는 “선수금 지급보증은 최악의 경우 조선사가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나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가도 선박만 인도되면 은행에 손해가 없다”며 “업계가 불황이라는 이유만으로 RG 발급이 지연돼 답답하다”고 말했다.

이현일/도병욱 기자 hiunea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