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27번의 실패'가 자랑인 다이슨
싱가포르 알렉산드라 테크노센터에는 날개 없는 선풍기 등으로 유명한 영국 가전기업 다이슨의 RDD(연구디자인개발:research design development)센터가 있다. 다이슨은 성능과 디자인은 따로 생각할 수 없다는 경영 철학에 따라 R&D(연구개발:research & development)가 아니라 RDD라는 용어를 쓴다. 다이슨의 RDD센터는 영국과 싱가포르 두 곳에만 있다.

RDD센터에 들어서면 커다란 흰색 판이 눈에 띈다. 이곳에는 1부터 5127까지의 숫자가 빽빽하게 적혀 있다. 별다른 설명은 없다. 그저 숫자가 쓰여 있을 뿐이다. 다만 제일 마지막에 청소기 사진과 함께 간단한 글귀가 적혀 있다. “5년간 5127개의 프로토타입. 모든 실패에서 교훈을 얻었다. 최후의 하나를 빼고는 모두 실패였다.”

5127은 다이슨 창업자이자 최고기술자를 맡고 있는 제임스 다이슨이 1984년 세계 최초의 먼지봉투 없는 청소기를 개발하기 위해 만든 시제품의 숫자다. 다이슨은 1979년 먼지봉투가 청소기의 흡입력을 줄인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먼지봉투 없는 청소기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5년간 지루한 실패만 이어졌다. 1984년 가까스로 개발을 완료했지만 경쟁사의 견제로 판매조차 하지 못했다. 창업을 한 것은 그로부터 7년 뒤인 1991년이다.

다이슨은 개발에 오랜 시간을 썼고, 상업적으로도 성공하지 못한 제품을 RDD의 상징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모든 직원이 RDD센터에 들어갈 때마다 5127이라는 숫자의 의미를 되새긴다.

다이슨은 이후 세계 최초의 날개 없는 선풍기, 제트기류를 이용한 헤어드라이어 등 창의적인 제품을 잇따라 내놓으며 ‘가전업계의 애플’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청소기 시장에서는 한 대에 100만원이 넘는 고가 제품만 팔지만, 매출은 물론 판매 대수로도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싱가포르 RDD센터에서 모터 개발을 총괄하는 안드리아노 니로는 다이슨의 사내 분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솔직히 동종 업계에서 다이슨보다 높은 연봉을 주는 곳도 많다. 제임스 다이슨이 워낙 많은 요구를 하기 때문에 일도 쉽지 않다. 그러나 이곳에선 엔지니어가 무슨 아이디어를 들고 와도 하게 해준다. 미친 것이나 다름없는 생각도 ‘일단 해보라’고 독려한다. 실패해도 과정을 기록할 뿐 아무도 질책하지 않는다. 다른 어느 기업보다 엔지니어가 신나게 일할 수 있는 직장이다.”

싱가포르=남윤선 기자 inkling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