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확충 '총대' 미루던 양측…'골든타임 실기' 우려에 서둘러 봉합
추경 편성은 일단 배제…정부 현금출자 규모 등 논란 불씨

정부와 한국은행이 재정과 통화의 '폴리시 믹스(policy mix·정책조합)'로 구조조정 실탄을 마련하는데 합의했다.

그간 국책은행 자본확충을 위한 관계기관 협의체 논의에서 재정·통화당국은 한은 직접출자나 자본확충펀드 보증 문제 등을 둘러싸고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그러나 구조조정을 위한 '골든타임'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논의에 가속도가 붙었으며 결국 정부 현물출자에 더해 최대 11조원 규모의 자본확충펀드를 조성하는 방안이 마련됐다.

이에따라 조선·해운 업종을 중심으로 산업 구조조정이 본격 진행될 전망이다.

그러나 내년 정부의 현금출자 규모 등 논란의 여지는 남았다.

◇ 직접출자 여부·펀드 지급보증 두고 '신경전'

8일 관계기관 합동으로 자본확충 방안이 나오기에 앞서 기획재정부와 한은, 금융위원회,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 등으로 구성된 관계기관 협의체는 한달여간 논의를 이어왔다.

협의체는 지난달 4일 첫 회의를 열고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금융시장 불안에 선제적으로 대비하기 위해 국책은행의 자본을 확충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으고 올 상반기까지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기로 했다.

재정과 중앙은행의 정책 수단을 포괄적으로 검토하고, 구조조정 당사자의 고통 분담과 국책은행의 자구계획 선행 등으로 국민 부담을 최소화한다는 원칙도 세웠다.

그러나 방법론에 있어서는 정부와 한은의 입장이 엇갈렸다.

애초 정부는 한은이 직접출자를 통해 자본확충에 적극 나서기를 내심 바란 반면, 한은은 이 경우 한은의 독립성이 훼손될 수 있다며 난색을 표했다.

1차 회의가 열릴 당시 국제회의 참석차 '아세안(ASEAN)+3(한중일)'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회의 참석차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머물던 이주열 한은 총재는 자본확충펀드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중앙은행이 투입한 돈의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출자보다는 펀드 등의 형식으로 대출하는 방식이 보다 부합한다는 이유에서다.

이어 19일에 협의체 2차 회의가 열려 자본확충펀드 조성과 직접출자를 병행하기로 정부와 한은이 사실상 합의하면서 자본확충 방안의 큰 가닥이 잡히는 듯했다.

하지만 한은 직접출자 여부를 둘러싼 갈등이 여전한 상태에서 자본확충 총대를 메는 모양새가 된 한은이 펀드 지급보증에 더해 대출금 조기 회수방안까지 요구하고 나섰다.

정부는 지급보증을 섰다가 한은이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하면 재정이 투입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만큼 국가 채무 규모를 늘릴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반대 입장을 표명하면서 양측 입장차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듯했다.

◇ '구조조정 실기' 우려에 갈등 서둘러 봉합…신보가 펀드 지급보증키로

자본확충의 양축인 정부와 한은 사이 갈등이 좀처럼 해소되지 않으면서 구조조정에 실기할 수 있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그러나 정부와 한은이 예상보다 이른 시점에 접점을 찾아내면서 구조조정 골든타임을 놓치는 게 아니냐는 우려는 잦아들 것으로 전망된다.

이날 발표된 국책은행 자본확충 방안을 보면 재정과 통화 정책조합이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춘 모습이다.

정부는 조선·해운업은 물론 철강·건설 등 경기민감 업종을 중심으로 시나리오별 영향을 분석한 결과 구조조정 상황이 악화되면 산은·수은에 5조∼8조원 수준의 자본확충이 필요할 것으로 추산했다.

이에 먼저 정부가 오는 9월 말까지 공기업 주식 등 1조원 규모로 수은에 현물출자하고, 내년도 예산에 산은·수은 출자 소요를 반영하는 등 직접출자를 통해 자본확충에 선도적 역할을 하기로 했다.

한은은 11조원 한도의 자본확충펀드를 만들어 지원이 필요할 때마다 재원을 마련하는 '캐피털 콜' 방식으로 운영하는 보완적 역할을 맡는다는 구상이다.

정부와 한은은 그간 시각차를 보인 펀드 대출금 회수방안에 대해 신보 지급보증으로 봉합했다.

시장 불안이 금융시스템 리스크로 전이될 경우 정부와 한은이 수은 출자를 포함해 다양한 정책수단을 강구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다만 그간 거론된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 가능성은 이번 발표에서는 제외됐다.

구조조정에 따른 대량실업 사태가 현실화하지 않은 만큼 편성 요건이 되지 않는데다, 현 시점에서는 현물출자 등 효과가 더 크다는 판단 때문이다.

◇ 지급보증 문제 해결했지만…내년 예산 반영 규모 등 '불씨'

정부와 한은이 구조조정 실탄을 마련하는 데 합의하면서 급한 불은 껐으나 내년 정부의 현금출자 규모 등 논란의 여지는 남았다.

문제는 내년 예산에 반영하기로 한 정부의 현금출자 규모다.

정부의 직접출자와 펀드 조성을 통한 한은의 우회 출자로 이뤄진 이번 자본확충 방안에서 한은의 대출 규모가 10조원 한도로 정해졌지만 정부 직접출자는 올해 중 수은에 1조원 수준의 현물출자밖에 정해진 게 없다.

정부는 산은과 수은의 출자 소요를 반영해 내년 예산에 현금출자 규모를 정하겠다는 방침이지만 올 9월 예정된 예산 편성을 앞두고 구조조정 진행 현황을 둘러싸고 각계 이견이 돌출하면 정부의 현금출자 규모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날 수 있다.

금융시스템 불안 시 추가 대응 방안도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정부와 한은은 구조조정 상황이 악화해 시장 불안이 금융시스템 리스크로 전이되면 다양한 정책수단을 강구하겠다고 밝혔지만 수은 출자 외에 다른 방식을 언급하지 않아 추후 각론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

정부가 국회 동의를 얻는 '정공법'을 선택하지 않았다는 점도 일부에서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정부가 제시한 자본확충 방법 중 내년 예산 편성을 제외하면 정부 현물출자, 펀드를 통한 간접출자 모두 국회의 동의를 얻지 않고 가능한 방안이다.

정부는 구조조정 재원 마련에 중요한 점이 속도이기 때문에 국회를 거치지 않은 방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지만 이에 대해 국회 논의 과정에서 정부의 대응 능력에 대한 비판을 피하기 위한 전략이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세종연합뉴스) 김동호 김수현 기자 dk@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