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신택수 기자 shinjar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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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협약은 구조조정 대상 기업이 채권단과 사적인 협약을 맺고 채권단 감독 아래 재무구조 개선 등 경영정상화를 추진하는 방식을 말한다.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과 형식은 거의 비슷하다. 다만 워크아웃과 달리 자율협약은 법적 강제 없이 자율적인 형태로 이뤄진다. 자율협약은 외환위기 이후 정부 주도의 대규모 기업 구조조정이 끝난 2000년대 초에 도입됐다. 2003년 옛 LG카드가 첫 적용 대상이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느슨한 형태의 자율협약은 부실기업 구조조정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커지는 자율협약 무용론

STX조선해양이 자율협약을 개시한 시기는 2013년 4월1일이다. 당시 STX그룹은 팬오션 매각에 실패하면서 유동성 위기가 커지자 자율협약을 선택했다. 채권단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는 조건으로 부실사업 정리 및 감원 등을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 전문가들은 당시 STX조선의 상황을 감안하면 자율협약이 아니라 법정관리가 더 옳았다고 지적한다. 유동성 위기를 일시적으로 해소하는 것만으론 생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STX조선은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 ‘빅3’와 달리 당시 해양플랜트 수주를 거의 못했다. 해양플랜트 수주가 거품으로 드러나면서 빅3 역시 대규모 적자를 기록했지만, STX조선해양은 새로운 돌파구로 여겨진 해양플랜트 수주를 못 할 만큼 경쟁력이 떨어졌다.

저가 수주를 통해 받은 선수금을 운영자금 등에 충당하는 ‘돌려막기’에 급급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STX조선은 채권단으로부터 4조4000억원을 지원받고도 끝내 법정관리행을 피하지 못했다. 조선업계 관계자는 “금융당국이 경제에 미치는 파장 때문에 법정관리를 결정하지 못한 게 오히려 화를 키웠다”고 말했다.

자율협약이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현안과 관련해 채권단 간 합리적인 의견 조율을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STX조선 자율협약에서 산업은행과 한국수출입은행, 농협은행 등을 제외한 시중은행은 반대매수청구권을 행사해 채권단에서 빠져나왔다. 회생이 어려운 만큼 퍼주기식 자금 지원 대신 다른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 먹혀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차라리 법정관리를 통해 저가 수주 등을 정리하는 게 정상화에 도움이 됐을 것이라고 시중은행은 지적하고 있다.

2014년 7월 자율협약에 들어간 동부제철이 결국 워크아웃 절차를 밟았고, 2013년 3월 자율협약을 시작한 동국제강 자회사 디케이아즈텍이 워크아웃을 거쳐 법정관리까지 간 것은 자율협약의 한계를 드러낸 사례로 꼽힌다. 채권은행 관계자는 “자율협약으로 기업회생을 위한 ‘골든타임’을 놓치게 한다는 지적이 많다”고 말했다.

재조명되는 법정관리

자율협약은 기업 오너가 경영권을 유지하는 데 상대적으로 유리한 구조조정 방식이다. 채권단이 대규모 출자전환을 감행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회사 지분은 유지한 채 자금을 지원받고 구조조정에 나서기 때문이다. 자율적인 협약인 만큼 대외적으로 부실기업으로 낙인찍히는 충격도 덜하다. 수주 등 대외사업을 하는 데 부정적인 영향이 적다는 의미다. 이런 이유로 워크아웃이나 법정관리보다 기업 오너들의 선호도가 높았다.

그러나 자율협약 과정에서 구조조정 기업은 물론 채권단 사이에서도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가 흔히 나타나고 있다. 많은 구조조정 대상 기업은 본질적인 경쟁력 강화보다는 유동성 위기에서 벗어나는 데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을 보였다. 이에 반해 시중은행은 채권 회수에, 국책은행은 당장 문제가 커지는 것을 막으려는 데 급급해 하는 모습을 보이기 일쑤였다.

이해관계 상충 때문에 기업 경쟁력이 오히려 훼손되는 일도 생겼다. 현대상선은 항만 등 핵심 자산을 팔았다. 성동조선해양 등 중소형 조선사는 주채권은행이 신규 수주를 못 하게 해 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채권단은 여신 회수를 위해 자율협약 기업의 외형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구조조정을 하고 있다”며 “조선사는 이미 수주한 선박만 인도하면 문을 닫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라고 밝혔다.

채권단으로선 당장은 충당금을 적게 쌓아도 되지만 결국 부담만 커지는 경우가 많다. STX조선해양을 담당하는 서울중앙지방법원 파산부가 지난달 31일 “구조조정의 성패는 적기에 절차에 진입하고 공적 자금을 적시에 투입하는 것”이라고 비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들어 법정관리를 통한 기업회생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퍼주기식 지원이 아니라 법원이 채권과 채무를 동결한 뒤 회생 가능성을 따지고 손실을 분담하는 방식이 더 명확하다는 이유에서다. 팬오션과 대한해운은 법정관리를 거쳐 비싼 용선료 계약을 해지했고 이후 흑자 전환에 성공한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최근엔 회생 기업의 경영연속성 관점에서 법정관리 절차가 재조명되고 있다. 기존관리인유지제도(DIP:debtor in possession)를 통해 법정관리에 들어가더라도 기존 경영진에 경영을 계속 맡기는 사례가 많아졌다. 쌍용건설은 김석준 회장이 법정관리 이후에도 그대로 대표이사를 맡았다. 재계는 물론 채권단에서도 법적 근거가 불명확하고 사후 책임 논란이 곧잘 불거지는 자율협약보다는 투명한 절차를 밟아 이뤄지는 법정관리를 통한 기업회생을 좀 더 활성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서욱진 기자 ventur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