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우고 차베스 前 베네수엘라 대통령(오른쪽)과 그의 후계자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고(故) 우고 차베스 前 베네수엘라 대통령(오른쪽)과 그의 후계자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네 살짜리 딸이 암으로 죽어가고 있는데 치료할 약이 없다.” “아이들이 먹지 못해 등교하는 학생은 60%뿐이다.” “극심한 식량 부족으로 사람들이 거리와 광장에서 개, 고양이, 비둘기를 잡아먹기 위해 사냥하고 있다.”

경제난이 악화하고 있는 베네수엘라에 대해 외신들이 잇따라 이 같은 실상을 전하고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지난 13일 베네수엘라에서 생필품 부족에 시달리던 군중이 나라 곳곳에서 약탈을 벌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인권단체인 베네수엘라 사회갈등관측소는 올해 1분기에 벌어진 약탈만 107건이라고 밝혔다.

니콜라스 마두로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이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그는 사태의 책임을 외국과 기업에 전가하고 있다. “‘브라질 쿠데타(의회가 주도한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 직무정지)’에 고무된 미국이 ‘베네수엘라 파시스트 세력’의 요청을 받고 나라의 안정을 뒤흔들고 있다”는 것이다. 마두로 대통령은 가격 통제를 비롯한 반(反)시장정책과 빈민층에 대한 무상복지로 ‘21세기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고(故)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의 후계자다.

미국 시사월간 디 애틀랜틱은 베네수엘라 경제난이 국민의 삶마저 위협하게 된 이유로 △저(低)유가에 취약한 석유 의존형 경제 △‘차비스모(Chavismo)’가 유발한 반시장·기업 정책 △무상복지로 인한 재정적자 등을 꼽았다. 차비스모는 ‘차베스주의’의 스페인어 표기로 차베스 전 대통령이 취한 대중영합적 좌파 노선을 뜻한다.

석유로 번 돈 무상복지로 낭비

베네수엘라는 외환수입의 95%, 국가재정의 50%를 석유 수출에 의존해왔다. 국제 유가 상승기에 집권한 차베스 전 대통령은 1999년 대통령 취임 후 2013년 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석유로 벌어들인 재원을 16년간 빈민층에게 무상교육·의료와 저가 주택을 제공하는 등 사회보장성 지출에 집중했다. 베네수엘라의 빈곤율은 1998년 49%에서 차베스의 무상복지로 2012년에 최저치인 25%를 기록했다.

한때 배럴당 100달러가 넘던 국제 유가가 2014년부터 급락하면서 석유 의존도가 높은 베네수엘라는 직격탄을 맞았다. 에너지컨설팅사 리스타드에너지에 따르면 베네수엘라 재정은 사회보장성 지출이 더해지면서 국제 유가가 배럴당 120달러는 돼야 균형을 이룰 수 있다. 국제 유가가 배럴당 40달러대에 머무르면서 베네수엘라의 디폴트(채무불이행) 가능성은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2016~2018년 만기가 도래하는 국채 원리금 상환액은 총 270억달러에 이르지만 외환보유액은 30억달러에 불과하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자국 화폐인 볼리바르화를 찍어내 채무를 갚기 시작했다. 이후 화폐가치가 급락하면서 물가는 치솟았다. 베네수엘라 정부에서 발표하는 공식 환율은 달러당 9.9875볼리바르다. 하지만 국제통화기금(IMF)은 실제 통용되는 암시장의 볼리바르달러 환율이 1110볼리바르에서 연말에는 6699볼리바르까지 치솟을 것으로 내다봤다.

IMF는 올해 베네수엘라의 물가상승률을 720%로, 내년엔 2200%에 이를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소비재의 70%를 수입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식량은 물론 전기, 수도, 보건 서비스 공급마저 어려워졌다. 베네수엘라 경제성장률은 지난해 -5.7%를 기록한 데 이어 올해도 -8%가 예상된다. 빈곤율도 73%까지 치솟았다. 올해 2월 마두로 정부가 경제위기 타개 방안을 발표했지만 석유 의존도를 줄이고 제조업 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변동환율제, 석유산업 민영화 등 근본적인 조치는 없었다.

반기업 정서 부추겨 경제 추락

국제 유가 하락 등으로 베네수엘라 경제가 위기에 빠지면서 차비스모의 본모습이 드러났다. 마두로 대통령은 14일 수도 카라카스 이바라 광장에서 한 연설에서 “부르주아들이 마비시킨 생산시설을 복구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라”며 “생산 중단으로 사보타주를 일삼는 기업인들은 수갑을 차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차비스모 경제 정책의 대표적 사례는 가격 통제다. 베네수엘라에서는 음식, 의약품, 차량 배터리, 향수, 심지어 화장지까지도 가격을 통제한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가격 통제 정책의 목적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빈곤층이 생필품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설명해왔다. 하지만 가격 통제로 공장이 문을 닫고, 빈곤층은 오히려 늘어났다.

디 애틀랜틱은 베네수엘라에서 20년간 공장을 운영해오다 경찰에 체포된 한 공장주의 얘기를 전했다. 그는 지난해 “화장실에 늘 휴지가 있도록 비치해야 한다”는 노조의 요구에 부딪혔고, 계속된 파업으로 결국 단체협약에 반영했다. 그는 가격 통제로 인한 생필품난에 화장지를 암시장에서 사모았다. 하지만 그는 정부에 체포됐다. 미국이 지원하는 ‘경제 전쟁’을 도와 화장지를 암시장에서 사재기하면서 생필품난을 부추겼다는 이유에서다. 디 애틀랜틱은 “공장주는 체포된 뒤 경찰관에게 수천달러를 주고 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고 보도했다.

베네수엘라 정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서 치안 문제도 심각해졌다. 멕시코 비정부기구(NGO) 공공안보·사법시민위원회가 인구 10만명당 살인 건수를 기준으로 지난달 28일 발표한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50개 도시’ 중 1위에 카라카스가 꼽혔다. 카라카스에서는 지난해에만 7676명이 살해당했다. 하루에 21명꼴이다.

대중도 외면하는 포퓰리즘

지난해 12월 베네수엘라 총선에서 16년 만에 야당인 민주연합회의(MUD)가 과반 의석을 확보했다. 전국 주요 도시에서 마두로 대통령에 반대한 시위도 끊이지 않고 있다. 마두로 대통령에 대한 국민소환투표도 추진 중이다. 국민소환투표 청원에 필요한 유권자 1%(20만명)의 아홉 배가 넘는 185만명에 달하는 국민이 청원서에 서명해 지난 2일 제출했다.

선거관리위원회가 서명이 유효하다고 인정하면 전체 유권자의 20%에 해당하는 400만명의 지지 서명을 받아 마두로 대통령에 대한 국민소환투표 절차에 들어갈 수 있다. 국민소환투표에서 760만표 이상을 확보하면 마두로 대통령은 물러나게 된다. 현지 여론조사업체인 다타날리시스에 따르면 올해 안으로 마두로 대통령이 물러나야 한다는 의견은 70%에 달하고 있다.

박진우 기자 jwp@hankyung.com
[글로벌 컨트리 리포트] '차비스모 덫'에 걸린 베네수엘라…굶주린 국민 폭동에 국정 마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