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할 일도 없고" … "회사 오래 앉아 있으면 승진확률↑"
잔업이 귀가보다 "훨씬 고통스럽게" 하지 않으면 백약이 무효

일본인은 세계에서 가장 오랜 시간 일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후생노동성이 16일 발표한 보고서에서도 정사원의 1개월간 잔업시간이 정부가 '과로사 산재인정 기준'으로 정한 80시간을 넘은 기업이 22.7%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을 정도다.

일본 정부와 기업은 잔업시간을 줄이기 위해 갖가지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다.

정부는 올봄부터 월간 잔업시간이 80시간을 넘은 직원이 한 명이라도 있는 기업에 대해 현장조사를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기업은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면 음악을 틀어 퇴근 시간을 알리는가 하면 사무실의 조명을 끄고 근무시간을 선택할 수 있게 하는 유연근무제 도입, 잔업을 하면 벌금을 부과하는 제도를 시행하는 등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다.

상당수 기업이 매주 수요일을 '잔업 없는 날'로 정해 강제퇴근까지 시키지만, 잔업은 줄지 않고 있다.

후생성의 '월간근무통계조사'에 따르면 2015년 현재 파트타임 근로자와 단시간 근로자를 제외한 일반 노동자의 연간 총노동시간은 2천26시간으로 20년 전인 1995년의 2천38시간에서 별로 줄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대체 이유가 뭘까.

경제전문 월간지인 닛케이(日經) 비즈니스 최신호(5월 16일)가 이에 관한 흥미 있는 분석기사를 게재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가장 큰 이유는 근로자들이 퇴근 시간이 돼도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외국에서는 볼 수 없는 이 독특한 이유로 잔업이 줄지 않는다는 것이다.

집에 돌아기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는 2가지다.

하나는 노동시간이 길수록 승진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독립행정법인인 산업경제연구소가 한 제조업 대기업의 인사 자료를 토대로 노동시간의 길이와 승진확률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결과 남녀 모두 노동시간이 길수록 승진확률이 높아지는 것으로 밝혀졌다.

특히 여성의 경우 상관관계가 더욱 뚜렷했다.

연간 총노동시간이 1천800시간 미만인 사람의 승진확률에 비해 2천300시간 이상인 사람의 승진확률은 무려 5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연구소 객원연구원인 야마구치 가즈오(山口一男) 미국 시카고 대학 교수는 "장시간 노동을 하기 어려운 여성은 승진기회가 적은 부서에 배치되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250여 개 회사에 잔업을 줄이는 방법을 자문한 사회보험 노무사인 모치쓰키 겐고(望月建吾)는 "50~60대가 회사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현재의 최고경영진은 거품경제기를 경험한 사람들이다.

시간을 투자하면 성과가 올랐던 자신들의 성공체험도 있고 해서 늦게까지 일하는 사원을 좋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미국 스탠퍼드대학 경제학부의 존 펜커벨 교수는 2014년 "주 50시간 이상 일하면 노동생산성이 떨어지며 63시간 이상 일하면 업무성과가 오히려 줄어든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70시간, 100시간 일하면 63시간 일하는 것보다 업무성과가 오히려 떨어진다는 것이다.

현장에서 일하는 사원의 대부분은 "그런 사실 정도는" 진작 알고 있지만 다만 업무를 효율적으로 하기보다는 중·장기적으로 회사 내에 있을 곳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출세를 원하는 사원에게 가장 좋은 전략은 효율 따위에 신경 쓰지 않고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해내는 것"이다.

집에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 2번째 이유는 가봤자 딱히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노동력을 착취하는 기업처럼 조직적으로 압력을 가하는 것도 아니고 오늘 꼭 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쓸데없이 잔업에 정성을 들이는 사원들 중에는 출세나 잔업수당 등의 수입증가에도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다.

이들이 퇴근 시간이 돼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까놓고 이야기하자면 "가봤자 딱히 할 일이 없다"는 것이다.

남성 사원 중에는 집안일을 하기 싫어서 돌아가기 싫다는 사람도 상당수 있다.

"상당수 일본인 남성들은 잔업 덕택에 집안일에서 손을 놓을 수 있었는데 잔업이 없어지면 이 '특권'이 없어진다"는게 쓰네미(常見) 지바(千葉) 상과대학 교수의 설명이다.

여성 중에도 집안일이나 저녁밥 준비 등이 하기 싫어 돌아가기를 꺼리는 사람이 있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30대의 한 여성은 "부부 사이가 나쁘지 않지만, 왠지 귀찮아서 '노 잔업 데이'에는 회식이 있다는 둥 적당한 핑계를 대고 평소 귀가시간 즈음해서 들어간다"고 털어놓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요즘 일본 수도권 근교의 베드타운에서는 '노 잔업데이'에 억지로 퇴근한 사람들, 이른바 '잔업 난민'들이 집에 들어가기 전에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이자카야와 패밀리 레스토랑, 파친코 점, 사우나 등이 특히 수요일에 톡톡히 특수를 누리고 있다.

이곳에서 적당히 시간을 보내다가 집에 늦게 가는 데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해" 걸어서 귀가하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이런 일본 산업계에서 예외적으로 잔업 제로를 달성한 경영자가 있다.

트림프 인터내셔널 재팬 사장을 지낸 요시코시 고이치로씨다.

1992년에 이 회사 사장으로 취임한 그는 19분기 연속 수입증대, 순익증대의 기록을 세웠다.

비결은 생산성 향상을 중심으로 한 '전업제로' 경영이었다.

그가 시행한 비법은 잔업 신고제를 시행하되 신고절차를 "집에 돌아가는 고통보다 물리적, 심리적으로 훨씬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잔업을 하면 반성회를 열어 반성문을 쓰게 하고 무슨 구실이든 만들어 반성문에 퇴짜를 놓아 잔업을 아예 끊을 때까지 매일 반성회를 열고 반성문을 쓰게 했다.

닛케이 비즈니스는 "일본인은 집에 가기 싫어한다"는 대담한 전제 위에서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잔업은 줄지 않고 일본기업의 생산성은 영원히 올라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경고했다.

(서울연합뉴스) 이해영 기자 lhy5018@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