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별세한 고(故) 임대홍 대상그룹 창업주는 국산 조미료 1호인 '미원'으로 한국 식품문화의 새 장을 연 인물이다.

순수 국산기술 조미료를 처음 개발한 한국 식품업계의 큰 별인 임 창업회장은 평생을 연구에 매달린 근면함과 특유의 소탈하고 검소한 생활로도 유명하다.

임 창업회장은 1920년 전북 정읍에서 5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리농림학교 수의축산학과를 졸업한 그는 1942년 고창군청 공무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45년 광복 이후 그는 학창시절부터 관심을 가졌던 모피가공업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25세 나이에 공무원직을 그만두고 정읍에서 피혁공장을 열었고, 2년 후 부산에서 대림상공을 설립했다.

제주도에서 피혁을 가공해 내륙으로 내다 팔면서 사업이 성장했으나 1948년 제주도에서 4·3사건이 일어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그는 부산, 마산, 청주, 서울 등지에서 피혁사업을 벌이며 재기했고, 6·25 전쟁 이후 무역업으로 사업을 확대했다.

임 창업회장이 조미료와 인연을 맺은 것은 이때였다.

무역업을 하면서 일본을 오가던 그는 일본의 각종 상품이 한국시장에 밀려들어 오는 현실을 목격했다.

그중에서도 일제 조미료 '아지노모토'가 국내 시장을 점령하는 것을 본 임 창업회장은 1955년 일본으로 건너가 1년여간 조미료 제조공정을 배우고 돌아왔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1956년 1월 한국 최초의 조미료 공장인 동아화성공업주식회사를 세웠다.

이 회사는 그해 6월 미원을 공식상표로 등록하고 본격적인 조미료 사업을 시작했으며, 1962년 사명을 미원으로 변경했다.

미원은 1960년대 초반 CJ제일제당의 미풍과 사운을 걸고 다퉜으며, 최근에도 대상의 '진국다시'가 CJ제일제당의 '다시다'와 맞붙는 등 양사의 경쟁은 이어지고 있다.

미원은 1970년대부터는 인도네시아, 일본, 홍콩 등 해외 진출을 본격화했다.

1980년대 이후에는 조미료 외에도 각종 장류와 냉동식품, 육가공식품 등을 생산하는 종합식품기업으로 발돋움했다.

임 창업회장은 1987년 그룹회장직을 장남인 임창욱 현 명예회장에게 물려주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이후에도 그는 제품 개발과 연구를 놓지 않고 끊임없이 실험실에 머물렀다.

국산조미료에 대한 헌신과 열정과 함께 그는 남다른 근면함과 검소함으로 널리 회자된다.

그는 세상에 나서는 외부활동 대신 평생을 조용히 자신의 공간에서 실험과 연구에 매달렸다.

출장을 가도 숙박료가 비싼 호텔을 찾지 않고 모텔이나 여관에만 묵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지방 이동 시에도 새마을호를 타지 않았으며 서울 시내에서도 자동차보다는 전철 등 대중교통으로 이동했다.

구두도 한 번에 두 켤레 이상 가져본 적이 없다는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그러나 그는 1971년 사재를 출연해 장학재단을 설립하는 등 사회 환원에는 앞장서왔다.

재계 관계자는 "임 회장은 사교적인 대외활동을 전혀 하지 않고 지나칠 만큼 검소하게 생활하신 분"이라며 "방문을 열어봐야 퇴근했는지 확인될 정도로 오로지 연구에만 몰두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외부에 나서지 않는 그의 성품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어졌다.

대상그룹은 임 창업회장의 유지에 따라 외부 조문을 받지 않고 가족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강종훈 기자 doubl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