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기업, 기존 업종 버리고 파격 변신
혁신 중심 된 중관춘·화창베이

세계는 지금 한중일 3국 기업들이 추구해 온 ‘패스트 팔로워’ 정신보다 ‘퍼스트 무버’ 정신을
더 요구하고 있고 창업 기업 등 기업 밖에서의 아이디어나 탤런트를 필요로 한다.

한중일 3국은 1900년대 중반부터 산업 강국으로 이름을 떨쳐 왔다. 현재 이들 3국이 세계시장에서 지배적으로 높은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산업들의 리스트는 매우 많다. 전통 산업에서 조선·철강·자동차 그리고 정보기술(IT) 산업에서 반도체·액정표시장치(LCD)·컴퓨터·휴대전화까지….

이러한 3국의 산업에서의 지배적 위치는 1970년대, 1980년대에 일본으로부터 시작됐고 1990년대, 2000년대에 걸쳐 한국이 일부 산업에서 일본을 능가하기 시작했는가 하면 2000년대부터 대부분의 산업에서 중국이 1위 생산·수출국으로 올라선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중국 선전시에 자리한 세계 최대 규모의 전자상가 ‘화창베이’.
중국 선전시에 자리한 세계 최대 규모의 전자상가 ‘화창베이’.
비록 중국이 반도체·자동차 등에서는 아직 수출 실적이 크지 않지만 자국 내에서 소비되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주요 생산국으로 부상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해외 수요 의존 전략 ‘흔들’

그런데 한중일 3국의 산업들이 지금만큼 강한 역풍을 맞고 있는 적이 있을까 싶다. 작년 이후 3국의 수출이 곤두박질치고 있는데, 주로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의 수입 수요가 급속히 줄고 있는 데 기인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석유 등 자원 가격의 급락에 따라 새로운 시장으로 떠오르던 신흥국들의 수입 수요가 크게 줄어든 것도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기실 한중일 3국의 주요 산업들이 규모의 효율성을 누리기 위해 주로 해외 수요에 의존해 발전해 온 점을 감안하면 향후 지속적인 산업 발전에 심각한 의문부호가 찍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물론 이러한 위기가 그동안 3국이 경쟁적으로 산업의 덩치를 키워 온 바람에 상당히 많은 과잉 시설이 누적돼 있는 점도 이러한 위기감을 더욱 부추기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을 비롯해 동아시아 3국이 ‘산업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산업 구조조정 측면에서도 일본이 가장 먼저 이니셔티브를 냈다. 이미 20세기 말에 한국과 중국에 시장을 빼앗기기 시작한 산업들의 구조조정을 돕기 위해 ‘산업활력재생법’이라는 법을 제정해 강력한 산업 구조조정에 착수했고 그 결과 일본 기업들은 종래의 주력 산업을 뒤로하고 새로운 비즈니스에 뛰어들게 됐다.

소니가 엔터테인먼트, 후지필름이 의약품, 도시바가 헬스 케어, 파나소닉이 자동차 부품 등으로 업종을 전환한 모습을 보면 놀랍기만 하다.

한국과 중국도 좀 늦기는 했지만 역시 산업 구조조정의 길로 들어선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한국이 작년 ‘기업 활력 제고를 위한 특별법’을 제정, 산업 구조조정을 원활하게 하는 길을 열었고 중국도 이른바 ‘신창타이(新常態)’라는 이름하에 기업들의 구조조정을 강력하게 종용하고 있다.

이러한 산업 구조조정 노력과 별개로 한중일 3국의 기존 산업의 미래는 어떨까. 하나는 값싼 노동력을 찾아 해외투자의 길로 나서는 방법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실 중국이 지난 몇 십 년 동안 일본과 한국 산업의 좋은 해외투자처로 간주돼 왔지만 최근에는 중국 산업도 해외투자의 길을 모색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이제는 베트남·인도네시아·인도 등의 후발국들로 눈을 돌리고 있다.

이러한 해외투자의 길은 이들 후발국들의 추격 속도를 빠르게 할 수도 있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구조조정·신산업 창출 난제 ‘한국만 제자리’
누가 ‘퍼스트 무버’ 경쟁 승자 될까

다른 방법으로는 또 하나의 산업 강국 독일이 ‘인두스트리 4.0’이라는 이름으로 추진하고 있는 산업 혁신의 길일 것이다. 중국이 ‘제조업 발전 2025’를 내세우고 있고 한국이 ‘제조업 혁신 3.0’을 추진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새로운 IT, 즉 사물인터넷(IoT), 3D 프린팅, 빅 데이터, 로보틱스 등을 접목해 기존 산업들의 경쟁력을 극대화하자는 계획이지만 일본 기업을 제외하고는 아직 한국과 중국의 갈 길이 멀어 보인다.

특히 중소기업들에는 이러한 기술을 도입하기 위한 재원이 부족하고 이를 지원해 줄 능력 있는 서비스 제공자들도 부족한 것이 걸림돌로 부각되고 있다.

한때 막강한 경쟁력을 자랑하던 기존 산업들이 위협에 직면해 있는 지금 한중일 3국이 희망을 걸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은 어쩌면 새로운 산업을 창출해 내는 길일 것이다. 지금까지 이들 3국이 이러한 목표를 가지고 여러 형태의 신산업 정책을 추진해 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중일 3국의 정책적 노력의 결과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3국 모두 창출하고자 하는 산업들이 주로 기술 개발이나 혹은 기존 산업에 연계된 분야들로서 결국 이른바 ‘공급 측면’의 요소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 기업들이 지금까지 ‘가이젠(改善)’이란 이름하에 ‘점진적 산업 혁신’을 추구해 온 것을 필두로 3국의 기업들은 연구·개발(R&D)을 통해 기존 제품의 품질을 향상하거나 생산 공정을 개선하는 데 집중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다.

3국의 기업들은 기존 산업에서 세계시장의 지배적 자리를 차지하는 데 성공했으므로 새로운 산업을 창출하는 데서도 비슷한 전략을 구사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우리가 매일 듣고 있는 뉴스는 신산업의 창출이 전혀 다른 분야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을 잘 알려주고 있다. 특히 미국의 실리콘밸리나 바이오 클러스터를 중심으로 사람들의 미래 생활 방식의 변화를 예견해 이른바 ‘수요 측면’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산업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지역에서의 신산업들은 인터넷 포털을 시작으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 이동통신 기술들을 응용해 이른바 핀테크, 공유 경제, 웨어러블 기기, 새로운 헬스 케어 등의 분야로 점점 더 다양하게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이러한 신산업들은 종종 지금까지 기존 산업들이 형성해 온 산업의 질서를 뒤흔든다는 면에서 이른바 ‘창조적 파괴’를 예견하게 한다. 문제는 신산업들이 태어나는 요람처로 실리콘밸리나 바이오 클러스터 등을 선호한다는 데 있다.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이러한 신산업들은 지금까지 한중일 3국 기업들이 추구해 온 ‘패스트 팔로워’ 정신보다 ‘퍼스트 무버’ 정신을 더 요구하고 있고 오히려 기존 기업들 내에서보다 창업 기업 등 기업 밖에서의 아이디어나 탤런트를 필요로 한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기술 개발로 이어지고 나아가 산업화의 길을 걸으려면 엔젤·벤처캐피털·액셀러레이터 등의 도움이 필요한 것도 잘 알려져 있다. 이런 ‘도우미’ 그룹이 실리콘밸리에는 즐비하지만 한중일 3국에는 부족한 것이 문제인 것이다.

더욱이 이미 성공한 실리콘밸리의 거대 기업들은 애플·구글·페이스북·아마존 등 창업 기업들과 협업해 신산업의 미래를 열어가는 데 매우 적극적이거나 심지어 절대적으로 여기고 있는 데 비해 한중일 3국의 대기업들은 이런 일에 소극적이거나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이런 환경의 차이 때문에 좋은 아이디어를 가진 세계 곳곳의 창업 기업이 실리콘밸리를 신산업의 분만처로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한중일 3국의 산업의 미래를 조망해 본 뒤 드는 두 가지 걱정이 머리를 어지럽힌다. 하나는 산업의 고용 창출 능력이다. 기존 산업들이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해외투자, 산업 혁신 등의 길이 모두 고용을 줄이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 향후 고용이 늘어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신산업 창출 분야에서 과연 3국 중 어느 나라가 먼저 ‘퍼스트 무버’의 정신을 살리고 이를 산업화할 수 있는 좋은 산업 생태계를 이뤄 낼 것인지 주목된다.

이와 관련해 기존 산업들의 산업화 과정에서 늦은 중국에서 중관춘·화창베이 등과 같이 실리콘밸리와 유사한 산업 생태계를 형성해 나가고 있는 점은 예의 주시해야 할 일이다.

김도훈 산업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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