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기업에 발목잡힌 은행들] 부실채권 규모 15년 만에 최대…비상등 켜진 은행 건전성
국내 은행의 작년 말 부실채권 잔액이 30조원에 육박하며 2000년 이후 최대치를 기록하는 등 은행 건전성에 경고등이 켜졌다. 한계기업에 대한 적기 구조조정을 미뤄온 결과다. 추세가 불안하다는 게 더 큰 문제다. 국내외 경기가 여전히 살아나지 않고 있어 기업 대출이 추가로 부실화할 가능성이 높아서다. 여기에 올 4월 총선, 내년 대선 등 정치적 이슈로 기업 구조조정이 또다시 지연되면 부실채권을 정리할 기회를 놓칠지 모른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미국 은행들이 2011년 4%대였던 부실채권 비율을 지난해 1%대로 떨어뜨리는 등 글로벌 ‘퍼펙트 스톰’에 대비해 곳간을 정비하고 있는 것과 달리 국내 은행들은 부실채권 비율 상승, 부실채권 잔액 증가 등 다중의 위험에 직면해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구멍 뚫린 은행 건전성

금융당국과 은행들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은행 건전성을 관리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2010년엔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에서 위험이 발생하자 조기에 부실채권으로 분류하고 이듬해 매각 등을 통해 신속히 정리했다. 덕분에 1999년 말 61조원에 달했던 부실채권 잔액은 2003년 이후로 ‘연 20조원 이하’를 꾸준히 유지했다.

그러다 2013년부터 분위기가 반전됐다. STX조선해양, 경남기업을 포함해 조선, 건설 등 경기민감 업종에서 대규모 부실이 드러나면서 부실채권 잔액(25조7000억원)이 20조원을 넘어섰다. 작년 말엔 28조5000억원으로 2000년 42조원 이후 최대로 치솟았다.

한계기업 구조조정을 적기에 시행하지 못한 게 은행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지만 정부나 은행은 미온적으로 대응했다. 그나마 추진된 구조조정도 시장 논리가 아니라 관(官) 주도 아래 제한적으로 이뤄지면서 이에 따른 위험은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농협은행 등 정부 우산 아래에 있는 특수은행들이 떠안았다. 일반은행의 부실채권 비율이 2014년 말 1.39%에서 지난해 1.13%로 떨어진 데 비해 산은과 수은은 각각 2.06%포인트, 1.27%포인트 급증하면서 전체 은행권 부실채권 비율을 끌어 올렸다.

일반은행의 건전성이 상대적으로 양호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지만 안심할 상황은 아니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한계기업이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3년 연속 이자비용보다 영업이익이 적은 한계기업 숫자는 2014년 말 3295개로 2009년보다 22%(597개) 늘었다. 작년 말 기준으로는 한계기업이 더 늘었을 것이란 분석이 많다. 은행이 기업에 빌려 준 여신 중 부실로 분류된 대출채권 비율만 해도 작년 말 2.42%로 2012년(1.66%)에 비해 급증했다.

◆기업구조조정 줄줄이 대기

올해도 상황이 녹록지 않다. 현대상선, 한진해운 등 대형 해운사는 여전히 뇌관이다. 기업별 자율 구조조정에 실패할 경우 조(兆) 단위로 대출을 해 준 산은 등 채권은행들의 부실채권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작년까진 분양 시장이 호황이어서 건설업종 위험은 덜했지만 올해는 주택대출 심사가 강화되는 등 악재가 겹쳐 중소 건설사들이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당국은 산은 등 특수은행을 제외한 일반은행의 작년 말 부실채권 비율이 1.13% 정도로 관리 가능한 수준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올해 총선과 내년 대선 등 정치적 이벤트로 인해 한계기업 정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산은 수은 등 국책은행은 물론이고 일반 은행도 위험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기업대출 연체가 급증하면서 은행들이 정상 기업 대출을 꺼리는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조선, 해운, 건설 등 경기민감 업종에 속한 기업들은 개별 여건과 관계없이 은행 문턱을 넘기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회사채 시장에서도 초우량 기업을 제외하면 자금 조달이 어렵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은행 입장에선 건전성 관리를 위해 기업 여신을 깐깐하게 하고, 부실채권을 신속히 정리해야 하는데 이럴 경우 실물경기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며 “은행 건전성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기업에 돈이 흘러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정부 정책의 딜레마”라고 말했다.

박동휘/김일규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