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세계 반도체 업계에는 '인수합병(M&A) 광풍'이 불었다.

작년 5월 말 HP에서 분사한 싱가포르의 무선통신·데이터저장용 반도체 기업 아바고(Avago)가 미국 반도체 기업 브로드컴(Broadcom)을 370억 달러(약 46조원)에 인수하면서 반도체 업계 역대 M&A 최고액 기록을 새로 썼다.

그 직후 세계 최대 종합 반도체회사 인텔이 칩 전문기업 알테라(Altera)를 167억 달러(약 21조원)에 사들였다.

반도체 업계를 더 놀라게 한 건 중국 국영기업 칭화유니그룹(淸華紫光集團)의 마이크론(미국) 인수 제안이었다.

미국 당국의 제동으로 인수 시도가 무산됐지만 칭화유니그룹이 제안서에 230억 달러(약 28조원)을 써낼 수 있었던 건 중국 정부의 막강한 지원 덕분인 것으로 분석됐다.

칭화유니그룹은 낸드플래시 시장 글로벌 3위 기업 샌디스크(SanDisk)를 간접 인수하려 했으나 이번 시도마저도 미국 조사당국과 주가 하락의 압박 때문에 불발에 그쳤다.

25일 시장조사보고서 트렌드포스(TrendForce)와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칭화유니그룹 외에도 중국의 '반도체 굴기(堀起)'를 뒷받침할 기업들이 잇따라 시장에 등장하고 있다.

일부 기업은 이미 탄탄한 위치를 점하고 있고 일본·대만과 미국 실리콘밸리의 인력 스카우트에 돌입한 곳도 많다.

국내 반도체 업계에도 연구개발(R&D) 인력을 겨냥한 중국 업체들의 거액 영입 제의가 잇따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때 일본 최대 메모리 반도체 업체이던 엘피다를 이끌던 사카모토 유키오(坂本幸雄) 전 사장은 최근 중국 지방정부계열 펀드의 자금을 지원받아 '재기'를 노리고 있다.

히타치제작소와 NEC 등이 합작한 엘피다는 메모리 시장에서 존재감을 과시했으나 2000년대 반도체 치킨게임(설비 증설경쟁)에 패하면서 2012년 마이크론에 인수됐다.

중국 안후이(安徽)성 허페이(合肥)시 정부는 사카모토 전 사장이 세운 사이노킹 테크놀로지에 투자하고 일본과 대만의 기술진을 영입해 메모리 반도체 양산을 추진 중이다.

국내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중국의 막대한 자금력이 메모리 업계를 재편하는 블랙홀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른 ICT(정보통신기술) 사업에서 자금을 축적한 중국 기업들이 반도체 영역을 넘보는 사례도 있다.

삼성, 애플에 이어 글로벌 스마트폰 시장 3위 기업인 화웨이(Huawei)는 반도체 사업을 위한 자회사 하이실리콘(HiSilicon)을 설립해 서버 및 데이터센터 시장에 뛰어들었다.

화웨이는 SSD(솔리드 스테이트 드라이브) 컨트롤러 칩 'Hi811'을 이미 출시했고 NVM(비휘발성메모리) 익스프레스 기반의 SSD 제품인 'ES3600'을 잇따라 내놓았다.

트렌드포스 보고서는 "한 해에 스마트폰 1억대를 판매한 화웨이의 시장 진입은 낸드플래시 산업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중국 최대 디스플레이 기업인 BOE도 지난해 조직개편을 통해 메모리 반도체 사업팀을 신설했다.

디스플레이 업계에서 5위권에 진입한 BOE는 반도체 사업을 전개하기 위해 한국·미국·일본에서 인재 영입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세계 최대 PCI(컴퓨터 주변기기 인터페이스) 익스프레스 기반 SSD 제조업체를 표방한 중국 기업 샤논시스템스는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업체 알리바바에 클라우드 컴퓨팅 및 데이터센터 관련 제품을 납품하면서 사세를 키우고 있다.

항저우(杭州)에 본사를 두고 낸드플래시 컨트롤러를 제조하는 세이지(Sage)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SSD 관련 제품을 만드는 산둥화신 등도 '제2, 제3의 칭화유니그룹'으로 도약하려는 기업으로 파악된다.

(서울연합뉴스) 옥철 기자 oakchul@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