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무형태 고려 없이 근로자수 기준으로 일괄 의무화
기숙사 거주 리조트도 설치 의무…도심 사업장 장소 물색 '하늘의 별 따기'


#1. 강원도에 있는 A리조트는 법에 따라 올해부터 직장어린이집을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한다.

문제는 근로자 대부분이 기숙사에서 거주하고 비번일 때만 가족이 있는 집에서 생활한다는 데 있다.

직원 중에는 미혼이 많기도 해서 어린이집에 보낼 아이가 있는 경우는 32명뿐이고 그중 리조트와 같은 지역에 자녀가 사는 경우는 6명뿐이다.

#2. 회계법인인 B사는 직장어린이집을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하지만 수요가 없어 골머리를 앓고 있다.

출입처에서 외근하는 근로자가 대부분인데, 자녀를 회사 어린이집에 데려다 놓고 다시 근무지로 나갔다가 퇴근할 때 회사를 거쳐 귀가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직장어린이집을 이용하려는 근로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3. 공항 관련 사업을 하는 C사의 경우 24시간 교대근무 체제라서 직장어린이집을 설치해도 출퇴근하면서 아이를 맡기기 어려운 상황이다.

회사 측이 육아근로자들을 가능한 한 오전 근무로 배치하려고 하지만, 심야근무에서 아예 배제할 수 없는 현실이다.

21일 관련 기업들에 따르면 정부가 올해부터 상시 근로자 500인 이상(여성 근로자 300명 이상) 사업장에 대해 직장어린이집을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했지만, 현실을 세심하게 살피지 않은 채 추진된 '탁상행정'이라는 지적이 많다.

당장 직장어린이집을 설치하지 않으면 1년에 2회까지, 1회당 최대 1억원의 이행강제금을 부담해야 하지만, 수요가 없거나 설치가 사실상 힘든 상황에서 발만 동동 구르는 기업들이 많다.

수요가 적은데도 의무적으로 직장어린이집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관련 법률인 영유아보육법이 대상 사업장을 '상시근로자'의 수로 일률적으로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소개한 사례처럼 의무 설치 대상이더라도 직장 어린이집이 구조적으로 육아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 의무 대상은 아닌데도 직장어린이집이 꼭 필요한 사례가 있지만 근로자수로만 대상 사업장을 정한 것이다.

서울시내에 본사를 둔 금융업체 D사의 경우 고심 끝에 직장어린이집을 만들기로 했지만 해결해야 할 문제가 많아 걱정이다.

최소 100평이 되는 공간에 초기비용 20억원과 연간비용 7억~8억원 정도가 필요하지만 직원들의 사기나 회사 이미지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해 건립을 결정했다.

하지만 장소를 찾던 중 난관에 부닥쳤다.

주변에 주유소나 유흥시설이 없어야 하고 1층이 아닐 경우 출입구 2개를 내야 하는데 도심에서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오피스텔도 알아봤지만 대규모 공간을 가진 곳을 찾는 데 실패했다.

도심에 사업장이 있는 회사들 중에는 D사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다.

게임회사 E사는 사옥을 임대해서 쓰기 때문에 저층에 직장어린이집 공간을 마련하지 못했다.

주위 오피스텔에 마땅한 공간을 찾지 못하자 회사에서 떨어진 곳으로 탐색 대상을 확대하는 중이지만 그럴 경우 수요가 있을까 걱정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있지만 마땅한 장소를 못 찾고 있다.

직장에서 떨어진 곳에 '직장어린이집'을 만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고 하소연했다.

공장을 수도권에 둔 F사는 또 다른 이유로 사업장에 직장어린이집을 만들 수 없는 처지다.

공장 특성상 유해물 배출로 인해 어린이집 설치 자체가 불허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 회사는 '직장 밖'에 직장어린이집을 만들어야 할 상황이다.

정부는 이런 어려움을 감안해 일반 어린이집과 위탁 계약을 맺으면 직장 어린이집 설치 의무를 이행한 것으로 간주하기로 했지만, 이 역시 쉽지 않다.

위탁 보육으로 의무를 이행하려면 그 비율이 0~5세 영유아를 둔 근로자의 30%를 넘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반 어린이집에 입소 희망자가 길게 줄을 서 있는 상황에서 어린이집 측이 굳이 불편하게 사업장들과 위탁 계약을 맺으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무 설치 대상을 판단하는 기준이 법적 용어가 아닌 '사업장'이고 '상시근로자'의 개념도 애매해 혼란이 발생하기도 한다.

게임업체 G사는 작년에 의무 설치 대상이었다가 일부 사업 부문을 분사한 후 대상에서 제외됐다.

근로자 수가 500명 이하로 줄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회사는 여전히 같은 건물 안에 있다.

실제 일하는 사람도, 근무지도 그대로지만 직장어린이집을 설치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경기도의 한 경찰서는 '상시근로자'에 지구대, 파출소 근무 인력을 제외해 줄 것을 요청하는 공문을 최근 보건복지부에 보냈다.

지구대, 파출소까지 '사업장'에 포함돼 작년 복지부 조사에서 미이행 사업장으로 분류됐지만, 지구대와 파출소를 제외하면 근로자수가 200명을 조금 넘겨 의무 사업장에서 빠지기 때문이다.

공기업이어서 직장어린이집 설치를 위해 예산 배정이 필요하지만 올해 관련 예산이 편성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자체 수입이 거의 없는 한 공기업은 직장어린이집 설치를 위해 건립비용과 운영비 등 8억원의 예산이 필요하지만 올해 예산 배정을 받지 못해 곤란해 하고 있다.

이 공기업 관계자는 "수년 전부터 직장어린이집을 지으려고 하고 있지만 계속 예산 확보에 실패했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사업장들이 불만을 제기하는 가운데 직장어린이집 의무 설치 제도가 강행되고 있지만, 정작 근로자들은 제도의 효과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30대 워킹맘인 H씨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직장에 아이를 맡기기 위해 새벽부터 아이를 깨워 어린이집 갈 준비를 시킬 엄두가 나지 않는다"며 "도우미를 고용해 집 근처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려다주도록 하고 있는데, 직장어린이집을 지을 돈으로 차라리 도우미 비용이나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고동욱 고상민 김영현 임보현 차대운 최은지 최종호 기자)

(전국종합=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