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계열사들이 이사회의 독립성을 강화하기 위해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별도로 선임할 수 있도록 잇따라 정관을 고치고 있다. 이사회 의장은 사외이사가 맡을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계열사를 제외한 삼성 계열사들은 지금까지 대표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겸직해왔다. 삼성그룹의 이 같은 경영구조 개편은 삼성 특유의 일사불란한 수직적 의사결정 체계에 중대 변화를 예고하는 것으로 투명·책임경영 확대를 위한 포석으로 해석된다.
삼성, 대표이사-이사회 의장 분리한다
삼성전자는 다음달 11일로 예정된 정기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겸직하도록 하는 기존 정관을 변경해 사내외 등기이사 가운데 의장을 선임하는 안건을 상정할 계획이라고 15일 밝혔다. 삼성전자 이사회 의장은 권오현 대표이사 부회장이 겸직하고 있다.

삼성SDI와 호텔신라도 다음달 11일 정기 주주총회를 통해 이 같은 정관 변경안을 상정한다. 삼성SDI는 조남성 사장, 호텔신라는 이부진 사장이 각각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삼성SDI 관계자는 “달라지는 경영 환경에 발맞춰 경영구조를 ‘글로벌 스탠더드(국제 표준)’에 부합하도록 정관을 변경하기로 했다”며 “이사회 운영의 책임과 유연성을 높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사회 이사 가운데 의장을 선임하는 만큼 이사회 구성원인 사내이사도 의장으로 선임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정관 변경의 취지와 그간의 선례를 고려할 때 이사회 의장은 사외이사 가운데 선임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다.

삼성 관계자도 “대표이사나 사내이사에게 이사회 의장을 맡길 생각이라면 굳이 정관을 바꾸겠느냐”고 반문했다. 삼성생명 삼성화재 삼성카드 삼성증권을 비롯한 삼성 금융계열사는 2006년에 이미 이같이 정관을 변경했고 현재 사외이사가 이사회 의장직을 맡고 있다.

이번에 삼성전자 삼성SDI 호텔신라가 정관 변경에 나서면서 제조·서비스 분야의 다른 삼성 계열사들도 속속 비슷한 의사결정 구조를 도입할 것으로 예상된다.

경제계는 삼성이 지난해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와 ‘일전’을 치르면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이번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고 있다.

엘리엇 같은 행동주의 투자자는 통상 기업경영의 불투명성 해소와 지배구조 개선을 명분으로 경영진을 공격하면서 투자 기업의 주가를 끌어올린다. 삼성으로선 이런 행동주의 투자자에게 추가 공격의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경영구조를 재편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채원 한국투자밸류자산운용 부사장은 “삼성의 이번 조치는 한국 주식의 저평가 요인으로 작용해온 지배구조 문제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기폭제가 될 것”이라며 “자사주 매입 방안과 마찬가지로 주가에도 호재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에 따르면 국내 유가증권시장 상장사 가운데 대표이사를 비롯해 사내이사가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 기업의 비중은 2014년 말 기준 96.41%에 달했다. 국내 상장사에 관행처럼 굳어진 대표이사의 이사회 의장 겸직 정관을 선도적으로 뜯어고치는 만큼 삼성의 시도가 신선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김익환 기자 lovep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