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조영남 기자 jopen@hankyung.com
자본주의가 도덕적이지 않다며 비난하는 사람이 많다. 자본주의가 도덕적이지 않은 이유로는 자본주의가 개인의 이익만을 강조한다는 점을 든다. 자본주의에서는 사람들이 공공의 이익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사회적 협동이 일어나지 않고 불평등이 심화되며 사회정의가 실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런 숭고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이익을 배제하고 이타심이 주가 되는 공동체 윤리로 대체할 것을 주장한다.

자본주의가 개인의 이익을 강조하기 때문에 도덕적이지 않다는 것은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온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권리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이며,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자신이 선택한 방식대로 자기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사회에서는 개인이 이타심이 아니라 자기 이익에 따라서 경제행위를 하더라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원이 효율적으로 배분되고 결과적으로 자신에게는 물론 다른 사람에게나 사회 전체에도 유익하게 된다는 것이 애덤 스미스의 혜안이다. 만일 자기 이익을 배제하고 이타심이 주가 되는 공동체 윤리로 대체하면 사회의 번영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타심은 인간 행동의 주요 동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뢰 깨는 반사회적 행위는 시장서 걸러져…사익 추구하는 자본주의가 더 나은 결과 낳아
인간 본성 중에 가장 기본적이며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자기애와 자기 이익이다. 이를 무시하거나 배제하면 사람들의 행동 동기가 사라져 경제활동이 위축된다. 따라서 자기 이익을 배제하기보다는 그것을 인정하고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는 도덕적 제약을 가하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다. 남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는 도덕을 강조한다고 해서 사기, 횡령, 절도, 폭행, 살인 등과 같이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도덕률로도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다. 이런 행위들로부터 개인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가 필요하고, 여기에 중요한 정부의 역할이 있는 것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는 자본주의 사회보다는 사회주의나 정부가 개입하고 통제하는 사회에서 더 많이 발생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도 사기나 횡령, 절도가 존재하지만 만연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사람들 간의 교환과 관계는 단 한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기 때문이다.

교환과 관계가 반복, 지속되기 위해서는 서로 적어도 상대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는 정직하지 못하고, 남을 속이며, 소비자를 기만하고, 종업원을 착취하는 기업이나 기업인은 시장에서 퇴출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는 그만큼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가 덜 발생하는 것이다. 오히려 정부가 개입하고 통제하는 사회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위가 더 많이 발생한다. 교환과 관계에서 타인에게 해가 되는 결과가 초래되더라도 정부나 정치권력에 의해서 그것이 감춰지거나 보호되기 때문이다.

도덕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자본주의를 비난하는 사람들 중 사회주의나 정부개입주의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그런 체제들이 사회협동, 평등, 사회정의와 같은 인간적인 가치를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목표는 그럴지 모르지만 그 결과는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는 만큼 개인의 책임을 강조한다.

사회주의나 정부개입주의 사회체제는 자기 자신의 문제에 대해 그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지 않고, 개인이 저지른 잘못을 사회의 책임으로 돌리는 경향이 짙다. 자기 행동에 스스로 책임지지 않고 사회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결국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도덕률에 어긋난다. 따라서 개인이 저지른 잘못에 대해 비난하지 않고 사회의 책임으로 돌리는 사회주의나 정부개입주의 사회체제보다는 개인의 책임을 강조하는 자본주의 사회가 훨씬 더 도덕적이다.

이뿐만 아니라 정부 개입이 크고 많을수록 구성원 간의 갈등이 증폭돼 사회적 협동이 오히려 잘 이뤄지지 않는다. 국가권력이 비대하면 정부나 정치인들은 그 국가권력을 이용해 특정 이익집단에 유리한 경제규제나 정책을 발효시킬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부정부패가 심해지고 자원 배분이 학연, 지연, 혈연 등에 따라 이뤄지면서 구성원 간에 갈등이 생긴다. 관치가 만연하게 되며 무사안일, 적당주의, 형식주의가 팽배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국민들 간에 분열이 생기고 자기 책임 의식이 줄어들며, 공동체 의식이 쇠퇴한다. 우리는 국가권력이 강했던 사회주의 국가와 정부의 개입과 통제가 많은 국가들에서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정부개입주의 등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그것 자체는 도덕적이지도 비도덕적이지도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의도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드러내는 실제 결과다. 개인의 자유가 억압되는 사회주의나 정부의 개입과 통제가 많은 사회보다는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자본주의가 더 인간적이고 도덕적인 결과를 낳는 사회다.

경제적 유인 바꾸자 영국 죄수호송선 생존율 ↑

개인의 자기 이익 추구가 공공의 이익을 늘린다는 것을 간파한 사람이 애덤 스미스다. 그는 《국부론》(제4권)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생산물이 최대의 가치를 갖도록 생산활동을 유도한 것은 오로지 자기 이익을 위해서다. 이 경우 그는 많은 다른 경우처럼 ‘보이지 않은 손’에 이끌려 그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목적을 증진시킨 것이 된다. 그의 의도에 없었다고 항상 사회에 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정말 의도적으로 증진시키고자 할 때보다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다가 사회의 이익을 더 효과적으로 증진시키는 일이 많다. 나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고 떠드는 사람들에 의해 그 이익이 실현된 예를 본 적이 없다.”

도덕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특정 윤리와 도덕을 강요하기보다는 개인의 이익을 따르도록 할 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인간적이고 도덕적인 결과를 낳은 실제 사례가 있다. 1860년대 영국은 선주, 선장들과 계약을 맺고 죄수들을 호주로 이송했다. 그러나 호주에 도착했을 때 죄수들의 생존율은 40%가 채 되지 않았다. 영국의 인권단체, 교회, 정부기관들은 도덕적 견지에서 죄수들을 인간적으로 잘 다뤄 생존율을 높여 달라고 선주와 선장들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죄수의 생존율은 높아지지 않았다.

그러자 한 경제학자가 선주와 선장들의 유인을 변화시킬 것을 제안했다. 죄수를 이송할 때 그 대금을 영국 항구에서 주는 대신 호주에 도착한 뒤 죄수 숫자로 계산해 지급할 것을 제안했다. 그 제안대로 시행하자 죄수 생존율은 즉각 98% 이상으로 올랐다. 이는 어느 날 갑자기 선주와 선장들의 도덕심이 높아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죄수와 함께 무사히 호주 항구에 도착해야만 이익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이전에는 선주와 선장들이 정원의 3~4배를 태우고 위생시설도 갖추지 않고 좋은 음식도 제공하지 않아 승선한 죄수 대부분이 병들어 죽었다. 이제는 죄수들을 생존시켜 호주까지 많이 데리고 가면 갈수록 이익이 되기 때문에 정원만 태우고 좋은 음식을 제공하고 위생시설을 잘 갖췄던 것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바람직한 일을 하도록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할 유인을 주는 제도다. 정부가 통제하고 간섭하는 사회에서보다 개인의 자유를 허용하는 자본주의가 그런 제도를 더 많이 허용한다.

안재욱 < 경희대 경제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