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 추락에도 양보 없는 경쟁…연말 50달러대 회복 전망

"끝까지 간다" 피 튀기는 미국·사우디
미국 셰일가스발 공급과잉 우려로 국제 유가가 하락한 지 1년 반이 지나고 있다. 작년 상반기 반등으로 회복됐던 가격 수준에서 다시 추가로 50% 가까이 하락하며 서부텍스사산원유(WTI) 가격은 이제 금융 위기 때의 저점인 배럴당 30달러 초반까지 내려앉았다.

사우디아라비아(이하 사우디)가 주도하는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작년 12월 초 원유 생산량 유지를 결정했다. 저유가로 재정 부담이 가중되면서 OPEC 회원국들 간 마찰은 있었지만 맹주인 사우디의 단호한 입장에는 변화가 없었다.

사우디는 8년 만에 국채를 발행하고 사상 첫 해외 채권 발행을 추진하는 등 저유가 환경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진행 중이다. 사우디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정부 부채비율은 2014년 말 1.6%에서 2015년 말 6%로 확대됐다.

외화보유액은 환율 방어에 활용되며 6355억 달러로 크게 감소하고 있지만 아직은 수년간의 재정 적자를 감당해 낼 수 있는 수준이다.

사우디의 양보 없는 압박은 미국의 셰일 기업들에 엄청난 부담이다. 작년 한 해 미국의 자원 개발(E&P) 기업 중 36개사가 파산했고 규모는 170억 달러에 이른다. 재무구조가 취약해 부채 상환 부담이 높은 기업들은 생산원가를 밑도는 저유가 환경에서 생존이 어려워졌다.

에너지 업종이 16%를 차지하는 하이일드 시장도 고전하고 있다. 평균 가산 금리는 7% 수준까지 치솟았고 올해 에너지 기업의 부도율은 11%까지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사우디, 지출 줄이고 장기전 채비

OPEC의 물량 공세와 이란의 수출 재개 임박, 부채 상환 부담 가중으로 코너에 몰린 셰일 업계의 극단적인 상황을 피하기 위해 작년 12월 미국은 9년 만의 금리 인상과 함께 1975년 이후 금지됐던 원유 수출을 40년 만에 전면 허용했다. 이미 WTI와 브렌트유 간의 가격 차이가 현격히 좁혀지면서 당장 대규모 수출이 이어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하지만 품질이 높은 미국산 원유에 대한 수요처가 미국에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에 오픈되면서 셰일 기업들의 생존 기회도 다양하게 확보됐다. 부실 한계 기업들을 파산으로부터 구제할 수는 없겠지만 혹시라도 우량 기업들이 연쇄부도로 무너지는 최악의 상황에 대한 탈출구는 열렸다.

원유 가격을 논하기 전에 원유 시장의 패권이 사우디 중심의 OPEC가 아닌 미국의 셰일 기업 쪽으로 옮겨가는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이제 사우디를 비롯한 산유 수출국들이 미국 시장뿐만 아니라 전 세계 시장에서 미국의 셰일 기업들과 전면적으로 시장점유율 경쟁을 펼쳐야 한다.

이 과정에서 시간은 걸리겠지만 구조조정을 거쳐 우량 기업들로 재편될 셰일 기업들이 비용 효율화와 공급 탄력성의 우위를 내세워 원유 시장의 주도권을 확보해 갈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10월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의 신용 등급 강등(A+)이 말해주듯이 재정과 수출의 원유 의존도가 80%에 이르는 사우디의 사정은 더 이상 여유롭지 않다.

흑자였던 사우디의 재정수지는 2015년 큰 폭의 적자로 돌아섰다. 1620억 달러로 줄어든 재정수입으로는 2600억 달러에 달하는 재정지출을 감당하기 어려워지면서 버티기 승부에 필요한 자금 확보를 위해 채권 발행과 외화 자산 회수가 불가피했다.

미국이 원유 수출을 전격 허용하자 사우디도 대응책을 내놓았다. 리얄화 환율 방어와 숨통이 트인 셰일 업계와의 최종 승부를 위해 본격적인 재정지출 감축에 나선 것이다.

사우디의 대응은 미국의 셰일 업계가 자본 지출을 줄이고 운영 비용을 축소하면서 한계생산비용을 낮춘 방식과 유사하다. 미국과 사우디의 치열한 공방으로 먼저 물러서면 밀리게 되는 가격 경쟁의 정면 승부는 정점을 향해 치닫는 상황이다.

미국과 이란의 수출 재개와 사우디의 재정 효율화는 저유가 상황의 연장을 의미한다. 이란은 연내에 하루 100만 배럴 이상을 추가 공급할 태세다. 재정 균형 유가를 낮춘 사우디는 하루 150만 배럴 이상의 예비 생산능력을 갖추고 있다.
"끝까지 간다" 피 튀기는 미국·사우디
미 셰일 업계도 아직 버틸 체력

미국 셰일 업계를 본다면 굴착만 끝내고 미완 상태로 보유 중인 유정 수가 늘어나고 있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현상의 이유는 한 푼이라도 아까운 상황에서 막대한 위약금을 감수하며 진행 중인 시추 계약을 취소하기보다 입지를 확보한 채 비용 소요가 큰 마무리 과정만 남겨 놓고 언제라도 채굴이 가능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유가 반등 시기를 기다리는 편이 보다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지정학적 이유든 수요 회복이든 경제적 수준으로 가격이 반등하면 가장 빠르게 시장 수요를 흡수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대기 물량은 땅속에 있는 잠재 원유 재고로서 원유 가격 반등 시 상단을 제한하는 요인이 된다.

최근 원유 시장은 공급과잉에 따른 재고 부담에 더해 OPEC 감산 불발, 미국 금리 인상과 수출 허용, 이란 수출 재개 임박 등의 요인들이 가격 하방 압력으로 작용하고 있고 중국 증시 급락의 영향권에 놓여 있다.

사우디와 이란 간 충돌이 변수로 남아 있지만 반전을 이끌어 낼 정도의 충격을 주지는 못하고 있다. 미국의 수출 허용으로 WTI와 브렌트유 간 가격 차이는 급격히 축소됐고 재역전도 가능해졌다. WTI 가격은 2008년 12월 금융 위기 당시의 저점 수준 이하까지 내려왔다.

사우디가 에너지 가격과 공공요금을 인상하며 재정지출 축소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미국 셰일 기업들의 헤지 효과는 올해 상반기 중에 거의 소멸하면서 임계 생산가격 이하로 떨어진 원유 가격은 급격한 재무 상황 악화를 낳고 있다.

긴 호흡으로 본다면 3월 말~4월의 계절적 수요로 반등이 있겠지만 구조조정이 마무리된 하반기 말에나 의미 있는 반등을 기대해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추가 공급 물량이 본격화되지도 않았고 수요 회복도 더딘 환경에서 지정학적 위험이 극단을 향하지 않는다면 제한적인 반등만 반복되는 약세장은 당분간 불가피해 보인다.

연초 배럴당 30달러 초반의 지지력을 확인하려는 하방 압력이 이어지다 1분기 말 이후 40달러 초반까지 회복, 이후 재하락 과정을 거친 후 연말 50달러대를 향한 반등 움직임이 진행될 것으로 예상된다.

신동준 하나금융투자 자산분석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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