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유가의 기준 역할을 하는 서부텍사스원유(WTI) 가격이 12년 만에 최저치 수준으로 떨어졌다. 지난 20일 배럴당 28.35달러로 30달러 밑으로 내려갔던 WTI는 22일 32.19달러로 반등했지만 공급 과잉 해소가 요원해 바닥을 가늠하기 힘들다는 지적이 많다.

유가가 30달러 안팎까지 떨어지면서 세계 경제에는 역(逆)오일쇼크가 현실화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 산유국들이 주식시장에서 대거 자금을 빼가면서 증시가 하락 압력을 받는가 하면, 중동에서 진행하고 있는 건설과 플랜트 등의 프로젝트에서 자금 회수가 어려워지면서 사업 자체가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유가 하락은 일반적으로는 경제에 도움이 된다. 각종 비용이 줄면서 소득이 늘어나는 효과를 가져온다. 하지만 세계 경제가 침체에 빠져드는 속도가 더 빠른 것이 문제다.

중국은 지난해 6.9% 성장해 25년 만에 7%대 성장률이 깨졌다. 철강 건설 조선 등에서 ‘좀비 기업’이 속출하면서 해고가 줄을 잇고 있다. 중국 수출 의존도가 높은 대만과 한국 등으로도 성장 둔화 여파가 퍼져나가고 있다.

저유가의 경기부양 효과가 크지 않은 가운데 산유국에선 수요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사우디는 원유와 천연가스 수출이 정부 재정 수입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베네수엘라는 수출의 95%가 석유인 남미 최대 산유국으로, 유가가 배럴당 117.5달러 이상 돼야 나라 살림이 균형을 이룰 수 있다.

산유국이 사회기반시설(인프라)이나 플랜트 건설을 줄줄이 미루면서 중동 건설과 수출이 많은 한국 같은 나라는 직격탄을 맞고 있다.

게다가 원유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시추시설과 철강 파이프, 원유를 실어나를 선박 등을 제조하는 업체도 줄줄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세계 경제가 좋지 않은 와중에 유가 급락은 경제주체들의 공포심리를 불러일으켜 디플레이션을 초래할 수도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예언해 유명해진 누리엘 루비니 미국 뉴욕대 교수는 저유가가 금융 영역에서도 세 가지 불안(disorder)을 야기한다고 말한다. 저유가가 디플레이션 악화에다 주식과 채권시장 불안정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저유가→금융시장 불안→실물경제 악영향’이란 경로가 새로 나타났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