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불신 키우는 정부 정책은 '착각'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매출액 상위 500대 기업 및 회원사를 대상으로 매년 실시하는 ‘사회공헌백서’ 2015년도 판에 따르면 조사에 응한 231개 대기업들이 2014년 한 해 동안 지출한 사회 공헌 규모는 2조6708억원이었다.

대기업들의 사회 공헌 규모는 크게 늘어나 2012년 3조2534억원을 기록했다가 이후 경영 실적 부진이나 대규모 시설 건립 종료 등의 이유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세전이익 대비 지출 규모는 3.5%로 최근 수년간 별 차이가 없어 대기업들이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회 공헌을 중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66개 기업 재단들은 전년 대비 4.5% 늘어난 3조3378억원을 지출했다. 대기업들은 취약 계층 지원, 교육·학교·학술, 문화예술 및 체육 등 3개 분야에 가장 많이 지출했고 기업 재단들은 교육·학술 지원에 많이 참여했지만 고가 의료 장비 및 시설 투자가 필요한 기업 병원 재단들의 지출이 전체 기업 재단 사회 공헌의 90%를 차지했다.

대기업들이 학교나 병원 재단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사회에 공헌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이후이지만 경제적·법률적 책임을 넘어 윤리적·자선적 활동을 벌이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은 2000년대 들어서부터 본격화됐다.

대기업들은 CSR를 사회 공헌이란 단어로 일원화하면서 경영 방침에 사회 공헌이나 책임 경영을 명문화하고 사회공헌위원회와 같은 전담 부서를 설치하고 담당자를 두고 있다.

이런 변화는 국제적 흐름을 상당히 빨리 쫓아간 결과다. 1980년대에 서구 경제학이나 경영학에서 주변적으로 논의되던 CSR가 경영 윤리나 전략 차원으로 확산되기 시작한 모멘텀은 1990년대 들어 지속 가능성 화두와 맞물리면서부터다.

이후 CSR의 국제화에 기여한 것은 국제기구와 그 지도자들이다. 코피 아난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 1999년 제창한 이후 유엔은 인권·노동·환경·반부패와 관련해 CSR 10대 원칙 ‘글로벌 콤팩트’에 세계 도처 기업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이행 과정을 점검했다. 국제표준화기구(ISO)는 2010년 11월 CSR 경영의 국제적 표준 지침으로 ISO-26000을 제정한 바 있다.

기업 규모 면에서 세계적이고 수출과 해외투자에 앞서고 있는 한국의 대기업들이 이런 흐름을 능동적으로 수용한 것은 언뜻 보면 자연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한국 대기업들의 CSR 활동은 대부분이 국내 사회문제 완화와 서비스 지원에 집중돼 있어 해외보다 국내서의 이유를 찾아야 한다.

사회 공헌, 자율인가 규제인가

기업들이 사회 공헌에 주목하기 시작한 동기에는 세습적 ‘오너 경영’ 지배 구조에 부정적인 반(反)`대기업 정서에 대한 대응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 점에서 대기업의 사회 공헌 활동을 진정성이 없는 이미지 홍보라고 폄훼하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동기가 홍보의 일환인지, 진정한 지속 가능성에 대한 성찰과 혁신 노력의 결과인지 따지는 것은 그리 유익한 일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기업의 사회 공헌은 현금, 현물, 자원봉사, 재능 기부 등 그 무엇이든 정부와 시민사회가 함께 사회문제의 해결을 돕는 데 꼭 필요한 우군이라는 사실이다.

동아시아연구원과 한국고등교육재단 산하 사회적기업연구소가 글로브스캔 국제 조사에 참여해 펴낸 연구서에 따르면 대기업에 대한 불신이 클수록 기업의 경제적 책임보다 사회적 책임을 우선시하는 규범적 사회 공헌 시각이 강하다.

이는 대기업의 사회 공헌을 자율보다 정부 규제나 법적 강제를 통해 추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있다. 반대로 대기업 신뢰도가 높은 서구 선진국에서는 기업의 사회 공헌 인식에 경제적 가치와 사회적 가치의 공유를 강조하는 공유 가치 창출에 대한 지지가 강하고 이러한 활동을 규제보다 자율에 의해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한국은 대기업 신뢰도가 낮고 기업의 규범적 사회 책임을 지지하는 전자의 국가군에 속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기업 신뢰는 어떻게 증대될 수 있을까. 사회 공헌을 기업 홍보의 도구 정도로만 생각하는 이들은 사회 공헌이 기업의 신뢰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무용론을 펼칠지도 모른다. 기업 신뢰는 복합적 요인들이 작동해 사회 공헌만으로 갑작스러운 효과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지난해 개봉된 영화 ‘베테랑’에서처럼 불법적이거나 비윤리적인 대기업 오너와 그 가족들의 행동은 분명 사회 공헌으로 쌓고 있는 기업 이미지를 실추시킬 것이다.

하지만 특정 기업의 이름을 거론하며 조사하면 제품 공신력과 연계돼 신뢰도가 높은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경향을 볼 때 일회성 스캔들이 대기업 신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보다 심층적 연구가 필요해 보인다.

앞서 언급한 연구서에서 흥미로운 연구의 하나는 2013년도 조사 자료 분석 결과 정부 신뢰, 대기업 신뢰, 시민 단체 신뢰의 상호 관계에서 대기업 신뢰와 정부 신뢰 간의 상관성이 가장 높다는 점이다. 즉, 정부 신뢰가 클수록 대기업 신뢰도 커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계적 경향이 친기업적인 보수층이 보수 정부에 대한 신뢰도 높아 빚어진 결과인지 아니면 정말 이념에 상관없이 두 가지의 신뢰가 상호 의존적이어 그런 것인지는 다년도 조사를 해봐야 알 것 같다. 만일 정부 신뢰와 대기업 신뢰가 함께 가는 것이라면 재벌 개혁 드라이브로 대기업 불신을 키우는 것이 정부 신뢰를 높여줄 것이라는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는 셈이 된다.

대기업에 대한 지원과 규제라는 이중적 수단으로 경제성장을 일군 한국은 정부와 대기업 관계가 정경유착과 재벌 개혁이라는 상반된 극단을 오갔다. 한편 진보 성향이 강한 시민 단체들은 대기업을 개혁의 대상으로만 간주해 왔다.

대기업 불신 키우는 정부 정책은 '착각'
이제 대기업들이 정부와 시민 단체 양측과 파트너십을 구축하면서 본격적인 사회 공헌으로 보다 살기 좋은 대한민국을 일구는 데 꾸준히 기여한다면 대기업의 신뢰를 증대시키는 데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따라서 대기업들이 사회 공헌을 넓고 길게 보고 투자하라고 말하고 싶다.

이숙종 동아시아연구원 원장·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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