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 한국 경제 이끈 기업·기업인] 일제 핍박 속 꽃피운 '기업가 정신'…가난한 나라를 부국(富國)으로 만들다
70년 전 광복 직후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던 한국이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사업을 통해 나라에 기여하겠다는 굳은 뜻을 가진 기업가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국내 1세대 기업가들은 일제 강점기 때 일제의 강압적인 재산 몰수와 핍박 등을 견디며 기업을 키웠다. 1세대 창업자들이 마련한 기틀 덕분에 한국은 광복 이후 ‘원조받는 나라’에서 ‘원조하는 나라’로 변신한 세계에서 유일한 사례가 될 수 있었다.

외화 절약에 앞장선 이병철

삼성의 창업주 고(故) 이병철 회장(1910~1987)은 1938년 3만원(현재 가치 약 35억원)의 자본금으로 직원 40여명과 함께 대구 인교동에 ‘삼성상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창업했다. 삼성그룹은 2014년 기준 자산 351조원, 직원 50만여명의 거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1951년 무역회사 삼성물산으로 자본을 모은 그는 설탕 제조업에 뛰어들었다. 설탕을 선택한 이유는 외화를 절약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당시 제일제당이 만든 설탕은 수입품 가격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제일제당이 설립된 1953년 100%였던 설탕 수입 의존율은 1년 뒤 51%로, 3년 뒤에는 7%로 떨어졌다. 엄청난 외화를 절약할 수 있었다.

이 회장이 설탕 다음으로 선택한 것은 밀가루였다. 직원들은 돈이 되는 제과업을 주장했지만 그는 이렇게 설득했다. “제과업을 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살자고 작은 회사들을 죽여야 하겠나. 나는 돈이나 많이 벌자고 기업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고 정주영 명예회장(1915~2001년)이 세상을 떠난 날 미국의 타임지(紙)는 그에 대해 “많은 사람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정 회장은 다른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많은 것들을 해낸 사람이었다.

최악의 조건에서도 완성한 경부고속도로, 미국 포드의 조립생산업체에 머물기를 거부하고 자체 모델을 개발한 자동차산업, 석유파동 당시 중동에 진출해 가뭄 속 단비 같은 달러를 벌어들인 건설사업 등이 그의 작품이었다.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현대건설은 이제 모두 한국의 간판 기업이자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는 고정관념에서 탈피한 기업가였다. 모두가 조선소를 건설한 다음 배를 수주하러 다니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때 ‘왜 조선소 건설과 선박 건조를 동시에 할 수 없는지’ 의문을 품고 동시에 진행했다. 현대건설이 중동의 주베일 항만 공사에 필요한 수중 구조물을 한국의 조선소에서 만든 다음 배로 실어간 것도 그런 예다.

국민 생활의 혁신 이끈 구인회

LG그룹의 창업주 고 구인회 회장(1907~1969)은 1931년 고향인 경남 진주에 ‘구인회포목상점’을 열면서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1941년 (주)구인상회를 발족하고 1945년 부산에서 미군정청 승인 제1호 무역업체인 조선흥업사를 설립했다.

그가 유통업에서 제조업으로 눈을 돌린 계기는 화장품이었다. 1947년 락희화학공업사를 세우고 럭키크림을 생산해 큰 매출을 올렸다. 크림통 뚜껑이 잘 깨지는 것을 보완하고자 서울에 연구소를 차리고 합성수지를 개발했다. 뚜껑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동시에 칫솔, 빗 등을 생산하면서 한국에 플라스틱 시대를 열었다.

구인회는 ‘사업은 기회고 선점’이라는 정신으로 1959년 금성사를 설립해 라디오 국산화에 성공했다. 금성사는 냉장고, 흑백TV, 전화기, 선풍기 등을 차례로 국산화하며 한국인의 일상을 크게 변화시켰다. 1964년 락희화학은 최초의 합성세제인 ‘하이타이’를 생산해 주부들의 생활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리더십과 지략의 조화 최종건·종현 형제

SK그룹을 일군 고 최종건 회장(1926~1973), 최종현 회장(1929~1998) 형제는 개성이 다른 두 사람이 조화를 이뤄 기업을 키워낸 대표 사례로 꼽힌다. 경기 수원 농가에서 나고 자란 두 사람은 판이하게 달랐다. 형은 추진력과 사교성이 좋았으며 동생은 조직력과 계획성에서 뛰어났다. 형은 1953년 자신이 다니던 선경직물을 인수해 본격적인 기업가의 길에 뛰어들었고 동생은 1962년 미국 시카고대에서 경제학 석사를 받은 뒤 귀국해 사업에 동참했다.

호흡이 잘 맞는 두 사람은 선경을 국내 최대 섬유기업으로 키워냈다. 특히 선경이 손꼽히는 대기업으로 성장하게 된 계기인 아세테이트·폴리에스테르 원사공장 건설은 형의 불같은 추진력과 동생의 지략이 결합된 작품으로 꼽힌다.

배오개의 거상 박승직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인 두산의 시초는 1896년 서울 종로4가 배오개에서 창업한 박승직상점이다. 경기 광주 출신 보부상이었던 고(故) 박승직 창업주(1864~1950)가 국내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설립한 포목(布木) 도매점이다.

그는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20~30대에 서울을 근거지로 짐을 직접 등에 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가내수공업제품을 사들여 도매상에게 판매하는 보부상 일을 했다. 10여년간 돈을 모아 차린 것이 박승직상점이다.

1916년부터 부인의 건의를 받아들여 ‘박가분’이라는 최초의 근대 화장품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배오개의 거상’으로 불리며 고종·순종의 승하 시 앞장서서 상인단을 결성하고 단장으로 활동하는 등 한국인 상인계의 리더로서 활동했다.

강현우 기자 h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