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이미 신뢰 상실" vs 프랑스 "그렉시트 막아야"

오랜 라이벌 관계인 독일과 프랑스 정상이 그리스 사태 해법을 놓고 정면으로 충돌했다.

유럽연합(EU) 통합을 이끌며 '유럽의 여제'로 군림해온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그리스 위기로 리더십이 흔들리고 있는 틈을 타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유럽의 맹주' 자리를 빼앗으려 한다는 것이 이번 사태의 숨겨진 배경이다.

◇ '원칙'의 독일 vs '연대'의 프랑스
12일(현지시간) 유로존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벨기에 브뤼셀에 도착한 메르켈 총리는 회의장에 들어가기 전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타결할 생각은 없다"고 못을 박았다.

메르켈 총리는 "'신뢰'라는 가장 중요한 통화(通貨)를 잃었다"며 단순히 단일통화 유로를 지키는 것보다 신뢰 회복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반면 올랑드 대통령은 "오늘 밤 협상을 타결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며 그리스의 유로존 잔류가 우선 순위라는 점을 피력했다.

올랑드 대통령은 "그리스뿐만 아니라 유럽의 운명이 걸려있다"고 말했다.

독일과 프랑스는 그리스 사태의 해법을 놓고 처음부터 미묘한 의견차를 보여왔다.

그러나 알렉시스 치프라스 총리가 국민투표라는 강수를 꺼낸 후부터 양국의 입장도 더욱 극명하게 대비됐다.

독일이 '한시적 그렉시트'까지 거론하며 그리스를 압박하는 동안 프랑스는 그리스 정부의 개혁안 작성을 도울 정도로 협상 타결에 협조적이었다.

AFP통신은 "양국 모두 협상 타결을 목표로 하면서도 메르켈 총리는 그리스에 유로존 규칙을 준수하라고 요구하고, 올랑드 대통령은 타협과 유럽의 연대를 요구하는 양상으로 불화가 생기고 있다"고 보도했다.

'유럽 통합'의 이상을 공유하고 있는 양국이 '원칙'과 '연대'라는 가치에서 대립하면서 유럽은 그렉시트가 아니더라도 분열의 위기를 맞고 있다.

장 아셀보른 룩셈부르크 외교장관은 최근 독일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독일이 그렉시트를 원한다면 프랑스와 큰 갈등이 생길 것"이라며 "이는 유럽에 있어 재앙"이라고 말했다.

유로존 정상회의가 13일 새벽까지 결론이 나지 않는 것은 목소리가 가장 큰 양국이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다.

독일과 프랑스는 유로존의 상설 구제금융 기구인 유럽재정안정화기구(ESM)에 각각 26.96%, 20.25%를 출자한 최대 출자국다.

◇ 국내 정치 고려에 셈법 복잡해진 양국 정상
메르켈 총리와 올랑드 대통령의 이 같은 충돌은 유로존 패권을 둔 '자존심 대결'이기도 하지만 각자 자국 정치를 염두에 둔 것이기도 하다.

미국 정치매체 폴리티코는 "메르켈 총리와 올랑드 대통령의 대립은 그리스를 둘러싸고 매우 상반되는 양국의 여론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국 여론과 정치 상황을 고려해야하는 양국 정상들로서는 충돌하는 가치 사이에서 딜레마를 피할 수 없다.

특히 임기 2년을 남기고 낮은 지지율로 고전하고 있는 올랑드 대통령은 좌우 양측에서 압박을 받고 있다고 AFP통신은 보도했다.

보수 야당은 그가 프랑스와 독일의 분열을 초래했다고 비난하고, 급진 좌파 진영에서는 그가 독일에 굴복했다고 비판한다는 것이다.

프랑수아 피용 프랑스 전 총리는 "올랑드 대통령이 메르켈 총리와 있을 때는 엄격한 입장이다가 뒤에서 치프라스 총리와 있을 때는 너그러워진다"며 "자신의 경제적·사회적 실패를 가리기 위해 '트러블메이커' 노릇을 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메르켈 총리의 경우 현재까지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올랑드보다는 자국 내에서 지지를 받고 있다.

집권당에 대한 지지도도 상승하고 있다.

그러나 강경한 태도에 대한 높은 지지는 오히려 부담이 될 수 있다.

독일 n-tv가 지난 8일 발표한 조사에서는 응답자의 92%가 그리스 3차 구제금융에 반대했다.

영국 일간 더타임스에 따르면 연립정부 의원 311명 중 100명 이상이 협상에 반대하고 있다.

메르켈로서는 그리스와의 구제금융 협상에 타결한다면 자국 내에서 거센 반발에 부닥칠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에 쉽게 타협할 수 없는 것이다.

(서울연합뉴스) 고미혜 기자 mihye@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