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셰프 이연복 "즐거운 마음으로 칼 잡아야 '작품' 나오죠"
모처럼 휴일에 거실 소파에서 뒹굴며 TV 리모컨을 누르다 보면 하얀 조리복의 셰프가 불쑥불쑥 나타난다. 최근 연예인이라고 하는 전문 방송인보다 TV에 더 자주 나오는 직업인이 바로 셰프다. 이는 일명 ‘먹방’, ‘쿡방’이라고 하는 요리 예능 프로그램 때문이다. 요리 전문 채널은 물론 종합 편성 채널, 지상파 드라마 소재로도 앞다퉈 스타 셰프를 내세우며 ‘채널 고정’을 주문하고 있다. 이들 셰프는 요리만 잘하는 게 아니다. 꽃미남 외모에 입담도 좋다. 영어나 일어는 기본이고 프랑스어에 이탈리아어까지 가능한 해외 유학파까지 더해져 재미를 더해 준다.

이런 와중에 기존 스타 셰프와 정반대 이미지의 인물이 등장해 시청자의 마음을 흔들며 방송가를 강타하고 있다. 이연복 셰프다. 아니 이연복 주방장이다. 그가 방송 프로그램에 등장하면 포털 사이트 순간 검색어 1위가 갑자기 그의 이름으로 뒤바뀐다.

대만 대사관, 최연소 주방장 출신

실제로 만나본 그의 첫인상은 이렇다. 방송에서 보여준 현란한 칼솜씨가 없었다면 가게 앞 임시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게 딱 어울릴 듯하다. 요리도 ‘맛있게 잘하기’보다 ‘푸짐하게 막 퍼줄 것’ 같은 분위기다. “1959년 왕십리 출생입니다.” 간략하게 이력부터 알려달라고 했더니 대뜸 돌아온 답이다. 56세, 방송 초짜 나이로는 많은 편이다. 왕십리라면 그 당시 서울에서는 손꼽을 정도로 못 사는 변두리 동네였다. 게다가 화교. 어린 시절을 무척 힘들게 보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역시나’다.

“초등학교 6학년 2학기에 학업을 접었어요. 가세가 기울어 급식비도 제때 못 내는 처지인데다 제가 3남 2녀 중 둘째였거든요.” 초등학교 중퇴가 최종 학력이란 얘기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중국집을 운영하던 유년기에는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고 한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할아버지의 방황으로 결국 열세 살 이연복 아이는 책가방 아닌 철가방을 들게 된 것이다.

“서울 중구청 옆의 조그만 중국집의 배달원으로 들어갔어요. 아버지 친구가 운영하는 곳인데 따돌림을 당해 1년 만에 나와 버렸어요.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어깨너머로 요리를 조금씩 배웠어요.”

‘요리로 성공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근무 환경이 좋거나 한 푼이라도 더 주면 움직였다. 그래도 가는 곳마다 일찍 출근해 선배들이 할 밑 작업을 미리 끝내며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차근차근 일을 배워 남들은 고등학교에 들어갈 나이인 열일곱 살에 이연복은 한국 최초의 호텔 중식당인 사보이호텔에 입사한다. 중국 요리의 기초를 제대로 깨우치기 시작한 시점이다. 그것도 잠시. ‘의리’를 앞세운 젊은 혈기에 폭행 사건에 휘말려 3년 만에 해고당한다.

경력 이야기를 들어봐도 여전히 셰프와는 거리가 있다. 철가방 배달원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주방에서 칼질을 한다고 믿어도 술 한잔 마시고 취기(醉氣)로 요리하는 빨간 코의 ‘취권 조리사’라고 그려질 뿐이다.

그런데 스물두 살부터 달라진다. 대만 대사관의 주방장 모집에 원서를 냈다가 그의 말처럼 ‘덜컥’ 합격한다. 당시 최연소 주방장으로 대사관에 입성한 것이다. 1980년부터 8년간 세 분의 대만 대사를 모셨다. 한국의 전직 대통령들도 다른 신분으로 대사관을 방문해 자신의 요리를 맛봤다고 한다.

“여기서 요리 실력이 부쩍 늘었어요. 매일 저녁 6가지 요리에 식사, 디저트로 이어지는 만찬을 여는데, 대사님은 매번 똑같은 메뉴를 드실 수 없다며 새로운 메뉴를 요구해 진짜 힘들었어요. ‘짠 수건 또 짠다’는 말이 이해가 가더라고요. 아이디어 내는 데 한계를 느끼고 8년 만에 그만뒀어요.”

미국에서 중국집을 열어 함께 일하자는 대사 아들의 제안이 있었는데 과감히 뿌리치고 일본으로 날아간다. 여전히 통제 불능 제멋대로 인물이다. 본인 역시 이때 미국행을 뿌리친 게 가장 후회스럽다고 했다. 일본의 삶 또한 파란만장하다. 일본에 가자마자 일한 곳은 식당이 아닌 빠찡꼬. 빠찡꼬는 구슬을 이용한 사행성 오락장이다. 종업원도 아닌 빠찡꼬 게임을 업으로 삼고 두어 달 동안 빠찡꼬에서 지낸 그는 ‘쉽게 번 돈으론 방탕한 삶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닫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간다. 한국에서의 ‘주방 경력’을 숨기고 시급 800엔(8000원 정도)짜리 술집 아르바이트부터 시작한다. 중식 안주로 실력을 인정 받아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면서 몸값을 올려 월급 60만 엔(600만 원 정도) 주방장 자리에 오른다. 그곳에서 2년 벌어 서울에 집을 샀다고 했다.

‘후각’ 잃었지만 맛과 향 놓치지 않으려 노력

1999년 서울로 돌아와 강남의 역삼동·압구정동에서 속된 말로 ‘대박’을 친다. 큰 접시에 3가지 요리와 밥을 내 주는 세트 메뉴로 히트를 친 것. 자장면 값이 3000원인 시절에 이 메뉴의 가격은 불과 4000원이었다. 이후 처형이 운영하는 교육청 앞의 식당을 인수해 ‘손만두’와 ‘동파육’으로 확실히 자리를 잡는다.

이연복 셰프의 ‘목란’은 2013년 10월 중순부터 연희동으로 옮겨 손님을 맞고 있다. 이곳을 찾는 손님들이 빠뜨리지 않는 메뉴 3가지가 있다. 탕수육·짬뽕·동파육이다. 짬뽕은 국물의 깊은 맛과 함께 빨간 기름이 뜨지 않아 좋다는 평가를 받고 있고 탕수육은 돼지고기의 감칠맛과 튀김옷의 바삭한 맛의 조화에 올 때마다 주문하게 된다는 칭찬 일색이다.

“30대까지는 간, 즉 짠맛을 잘 다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환갑을 바라보는 지금의 답은 마음입니다. 짜증난 마음으로 음식을 만들면 대충 만들게 되고 즐거운 마음으로 칼을 잡으면 작품이 나옵니다. 작품을 드시는 손님은 당연히 행복하겠지요?” 맛내기의 비결을 묻자 이렇게 답을 하곤 자신이 동파육을 만드는 과정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동파육은 중국의 시인 소동파가 좋아했다는 삼겹살 요리다. 찌고 튀기는 과정을 여러 번 거치기 때문에 6시간 이상 걸린다. 목란에선 하루 전 예약해야만 맛볼 수 있는 메뉴다.

“맛있는 요리는 좋은 식재료에서 출발해요. 공들여 몇 시간씩 만드는데, 냉동육을 쓰면 그 수고가 아깝잖아요. 그래서 예약이 들어오면 당일 아침에 직접 신선한 냉장육을 사다가 요리를 시작해요.”

이연복 셰프에겐 알리고 싶지 않는 신체적 결함이 하나 있다. 코 문제다. 스물여섯 살에 축농증 수술로 후각을 거의 잃어버렸다. 상대적으로 발달한 미각으로 버틴단다. 맛과 향을 놓치지 않기 위해 담배도 끊었다. 술도 맥주 2병이면 끝이다. 이 셰프의 식사 시간은 하루에 두 번, 일반인의 늦은 점심과 야식 타임에 해당하는 오후 2시 반과 오후 9시다. 아침을 거르는 게 일상이다. “배가 부르면 간 보는 게 둔감해져요. 음식점 종업원들은 보통 10시 반 정도에 아침 식사를 하고 점심 손님을 맞는데 저는 그때 굶어요.”

최근 갑자기 스타 셰프가 되면서 여기저기 출연 요청이 잇따르고 있다. 그래도 영업시간엔 자리를 비우지 않는 게 이 셰프의 철칙이다. “음식의 맛은 단순하지 않아요. 기대했던 사람이 없으면 맛이 절반으로 뚝 떨어지기 마련이거든요.”

방송을 하면서 놀라운 사실을 알았다는 이 셰프.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먹는 외국 음식이 중식인데 중식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것이다. 앞으로 기회가 될 때마다 자장면·짬뽕·탕수육을 벗어난 중화요리의 무한한 세상을 펼쳐 보이겠다고 힘줘 말했다.

‘셰프’보다 ‘주방장’이란 호칭이 더 어울리는 이연복. 그의 음식은 방송에서도 목란에서도 멋스럽지는 않다. 오히려 거칠다. 그래도 맛있다. 그래서 그의 음식을 먹은 사람들은 그를 ‘요리계의 천연 조미료’라고 평가하나 보다.

유지상 음식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한국경제매거진 한경BUSINESS 1016호 제공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