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스토리
인력유출 심각한 국책연구소

국책연구기관 세종 등 이전에 석·박사급 인력 무더기 퇴사
"지방 KDI 가느니 서울 민간行"

정부 간섭 심해져 자부심 상처…대학 교수 되기위한 발판 삼기도
그래픽=신택수 기자 shinjar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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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책 연구원인 한국법제연구원에서 연구부서장을 지낸 A연구위원은 작년 하반기 수개월의 병가 끝에 연구원을 그만뒀다. 법제연구원이 세종시로 옮겨 간 지난해 1월부터 매일 네 시간 이상 서울과 세종을 왕복하며 출퇴근을 하다가 건강이 나빠진 탓이다. 법제연구원 관계자는 “지난해 석·박사급 연구원 8명(12.9%)이 그만두는 등 경험과 연륜이 있는 연구인력 유출이 심각하다”고 말했다.

KIEP, 3년간 33명 사직

국책 연구기관이 석·박사급 핵심 연구인력의 잇단 퇴사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국무총리실 경제인문사회연구회의 ‘국책 연구기관 연구직 이직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이 연구회 소속 23개 국책 연구기관의 정규직 연구원 퇴사자는 113명(4.7%)으로 나타났다. 최근 3년간(2012~2014년) 이직자는 334명으로 전체(2380명)의 16.4%에 달했다.

통상과 국제 관계 등을 다루는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지난해 14명(12.6%)의 정규직 연구원이 그만뒀다. 최근 3년 동안엔 33명(29.7%)이 연구원을 떠났다. 한국법제연구원과 정보통신정책연구원(11.3%)도 지난해 정규직 연구원 퇴직률이 10%를 넘었다. 특히 국내 간판 국책 연구원인 한국개발연구원(KDI)도 최근 3년 동안 42명의 석·박사급 연구원이 떠나 전체 연구인력(213명)의 19.7%가 교체됐다.

한 국책연구소 관계자는 “급격한 인력 유출을 막을 수 있는 마땅한 대책도 없다”며 “민간 연구소에 비해 월급이 적어도 국가 과제를 맡아 연구한다는 자부심에 능력 있는 인재들이 국책연구소로 몰렸지만 앞으로는 우수 인재 확보도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특급 대우는커녕 지방 이전이라니…”

개발 연대인 1970년대 KDI나 중동문제연구소(현 산업연구원의 전신) 등이 설립될 당시만 해도 국책 연구원은 고급 두뇌들이 선망하는 최고 직장이었다. 정부는 해외 유학파 우수 인재를 유치하기 위해 아파트와 자동차 등을 제공하고 연봉도 파격적으로 지급했다. 198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대와 버지니아주립대에서 교수로 있던 김준경 KDI 원장도 당시 특별 영입된 인재 중 한 명이었다. 그러나 최근엔 이 같은 대우는커녕 민간 연구원보다도 위상이 낮아졌다는 평가다.

우선 석·박사급 인력 이탈은 국책 연구기관의 지방 이전과 무관하지 않다. 정부의 공공기관 지방 이전 계획에 따르면 내년까지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소속 23개 연구원 중 14개는 세종시로 이전하고 나머지 6개는 전남 나주와 울산 등 지방으로 옮긴다. KDI 관계자는 “젊은 연구자 사이에선 지방에 있는 KDI를 가느니 서울에 있는 민간 연구원에 들어가겠다는 의견이 많다”며 “10년 전만 해도 국책 연구원 대신 민간 연구원을 택하는 건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라고 말했다.

입사 포기도 속출

일부 기관은 신규 채용에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전남 나주로 이전하는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은 지난해 채용 과정을 통과한 연구원 5명 가운데 3명이 근무 시작 직전 ‘입사 포기’를 통보했다. 연구원 관계자는 “해외에서 리크루팅을 해도 지방에 있는 연구원은 인재를 붙잡기가 쉽지 않다”고 전했다. 최근 농촌경제연구원은 채용 방식을 ‘연 1회 채용’에서 ‘상시 채용’으로 변경했다.

국책 연구원에 대한 정부 부처의 간섭이 심해진 것도 한 요인이다. 정부 입맛대로 보고서를 써야 하는 상황이 많다 보니 학자적 자부심에 상처를 입는 일이 잦다는 것이다.

졸지에 ‘징검다리’ 신세

국책 연구원을 대학교수가 되기 위한 발판으로 삼는 젊은 연구원이 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최근 국내 대학들은 갓 박사학위를 딴 젊은 연구원의 채용을 꺼리는 분위기다. 이 때문에 교수가 되기를 원하는 연구원들은 우선 국책 연구원을 ‘징검다리’로 경력을 쌓다가 대학에 자리가 나면 주저없이 떠나고 있다는 전언이다. 최근엔 기업 소속 민간 경제연구소로 이동하는 추세도 보인다.

문제는 오랜 기간 국가 정책을 맡아온 국책 연구원의 연구 기반 자체가 허물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담당자가 자주 바뀌면서 정책 연구의 연속성이 떨어지기도 한다. 이제 막 박사학위를 딴 연구자에게 정책 수립 등의 업무를 가르치려면 2~3년 이상이 걸리는데 일을 시킬 만하면 그만두는 일이 많다. 한 민간 연구소 관계자는 “요즘 일부 자료를 보면 전문성이 떨어지고 ‘보고서를 위한 보고서’를 내놓는다는 느낌이 자주 든다”며 “결국 정부 정책의 부실로 나타날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우섭 기자 dut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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