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드라이브'건 이재용] M&A 빨라지고 '빅샷' 만남 늘고…큰 그림 그리는 이재용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24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세계 최대 전자결제 서비스업체인 페이팔의 공동 창업자이자 세계적 스타트업(신생 벤처기업) 투자 전문가인 피터 틸과 만나 정보기술(IT)과 금융이 결합된 핀테크, 빅데이터, 공동 벤처투자 방안 등을 폭넓게 논의했다. 삼성의 주력 사업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분야다. 대부분 미래 사업들이다.

삼성전자 글로벌 마케팅을 책임지는 홍원표 사장과 틸의 한국 내 사모펀드를 운영하는 크레센도 에쿼티 파트너스의 이기두 한국 대표도 자리를 함께했다. 금융 쪽에 관심이 많은 이 부회장이 틸과 만나 공동으로 벤처투자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이번 미팅은 삼성전자가 지난 18일 모바일 결제 분야 스타트업인 미국 루프페이를 인수하는 등 최근 공격적 인수합병(M&A)에 나서고 있는 가운데 이뤄져 더 주목을 받았다.

이 부회장은 세계 최대 가전전시회 CES와 다음달 초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리는 ‘모바일 월드 콩그레스’(MWC)에 가지 않는 대신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을 만나면서 삼성의 미래 사업을 직접 챙기고 있다. TV, 스마트폰, 반도체 등 당장의 캐시카우(주 수익원)는 각 분야 사장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미래의 큰 그림을 그리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의미다. 지난해 5월 부친인 이건희 회장의 갑작스러운 입원 이후 이 부회장의 행보를 살펴보면 이런 경향이 뚜렷하다. 이 부회장이 만난 사람들 면면을 보면 삼성의 미래를 엿볼 수 있다.

이 부회장은 지난해 7월 미국 선밸리에서 팀 쿡 애플 CEO를 만난 데 이어 작년 9월에는 한국을 방문한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MS) CEO와 회동했다. 이후 삼성은 애플과는 미국 외 다른 나라에서 스마트폰 특허소송을 모두 철회하기로 했고, MS와도 특허 분쟁을 종결하기로 합의했다. 소모적인 소송전에서 벗어나 미래에 집중할 수 있는 힘을 비축한 것이다. 삼성 관계자는 “소송을 종결하는 데 이 부회장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전했다.

지난해 10월에는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CEO가 삼성 서초사옥을 찾았다. 당시 저커버그는 이 부회장을 만난 뒤 페이스북 임원 40여명과 함께 경기 화성의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둘러보며 감탄사를 연발하기도 했다. 삼성으로선 미래 경쟁력에 중요한 콘텐츠 분야 강자를 확실한 우군으로 만든 순간이었다.

이 부회장은 지난해 11월에는 스위스 바젤에 본사를 둔 다국적 제약기업 로슈를 방문해 제베린 슈반 CEO와 바이오·제약 분야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바이오·제약은 자동차용 전지, 의료기기, 태양전지, LED(발광다이오드)와 함께 삼성이 2010년 5대 미래 먹거리로 꼽은 사업이다. 이 부회장은 특히 바이오·제약 분야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회장이 이처럼 미래 먹거리에 집중하는 것은 그동안 막대한 이익을 벌어다 준 스마트폰 사업의 호황이 끝나가고 있다고 판단해서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스마트폰 부진 여파로 9년 만에 매출이 줄었다. 이에 따라 새 승부처로 사물인터넷(IoT)과 기업 간 거래(B2B) 등을 내세웠지만 아직까지 수익성이 검증되지 않았다.

이 회장이 글로벌 기업으로 키운 삼성을 한 단계 더 끌어올려야 한다는 부담도 적지 않다. 이 부회장은 평소 “(이건희) 회장님이 키운 회사를 단순히 유지만 해선 안된다는 게 저의 가장 큰 스트레스”라고 토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이 부회장의 소탈하고 겸손한 성격은 삼성이 IT 인재를 유치하고 글로벌 기업들과 협력하는 데 유리하다”면서도 “이 부회장이 과거 이 회장이 했던 것처럼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는 선언을 해야 할지 모른다”고 지적했다. 삼성이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선 이 부회장이 지금보다 더 빠른 혁신을 이뤄내야 한다는 의미다.

주용석/정지은 기자 hohobo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