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6개월째 이어지고 있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 제한 조치를 완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정부 내에서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방사능 오염에 대한 국민의 불안감이 여전하지만 한국 측 수입 규제 강도가 지나치게 높고 과학적 근거도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이 많아 일본이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할 경우 패소할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에서다. 이대로 시간을 끌다간 자칫 통상자유국가로서의 이미지만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일본 수산물 수입제한 '딜레마'…통상마찰 vs 식탁 여론
11일 정부에 따르면 외교부 산업통상자원부 식품의약품안전처 등은 다음달 일본산 수산물 수입 규제를 완화하는 문제를 공론화하기로 하고 부처 간 협의에 들어갔다.

일본산 수산물의 안전성을 검증하고 있는 ‘일본 방사능 안전관리 민간전문가위원회’가 이르면 이달 말 발표하는 최종 조사 결과와 연계해 추진한다는 복안이다. 이 위원회는 작년 말에 이어 지난달 12~17일 일본산 식품에 대한 방사능 안전관리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현지 조사를 마쳤다. 민간조사위원장인 이재기 한양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아직 보고서를 완성하지 않았지만 일부 시료를 검출한 결과 방사능 수치가 (기준선보다) 높게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일본 “WTO 제소하겠다”

현재 정부가 검토하고 있는 방안은 일본 수산물 중 방사능 오염물질인 세슘이 0.1베크렐(Bq) 이상 검출된 수산물의 수입을 차단하고 있는 ‘규제임시특별조치’를 해제하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방사능 오염수 유출 문제가 공론화되자 2013년 9월 대대적인 금수조치를 취했다.

후쿠시마 근처 8개 현 인근에서 어획된 수산물 전체를 수입 금지하는 동시에 8개 현을 제외한 지역의 수산물에 대해선 0.1Bq의 세슘이라도 검출될 경우 스트론튬, 플루토늄 등 기타 핵종에 오염됐는지 여부에 대한 ‘비오염 증명서’를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 수산업자가 비오염 증명서를 발급받으려면 최대 3개월 정도 시간이 필요해 신선도를 생명으로 하는 수산물의 대(對)한국 수출은 사실상 봉쇄됐다. 때문에 현재 한국에 들어오는 수산물은 세슘이 전혀 검출되지 않은 것들로 이뤄져 있다. 그 여파로 2011년 4만466t에 육박하던 일본산 수산물은 2013년 2만723t, 지난해 1만8285t으로 각각 48.7%, 54.8% 급감했다.

당시 정부의 강도 높은 수입규제 조치는 과학적·경제적 논리로만 결정한 것은 아니었다. 얼어붙은 양국 간 정치·외교적 관계가 더 큰 영향을 미쳤다. 극우 성향의 아베 신조 총리가 이끄는 내각이 일본군 위안부 및 과거사와 관련된 망언을 계속 쏟아내면서다.

○“한국 패소 가능성 높다”

일본 수산물 수입제한 '딜레마'…통상마찰 vs 식탁 여론
이런 가운데 수입 규제를 풀어달라는 일본 측의 압박은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지난달 8일 서울에서 열린 한일경제협의에서 나가미네 야스마사 일본 외무성 외무심의관은 일본 8개 현의 수산물 수입 금지 해제를 강력히 요구했다. 연초부터 첫 의제로 이 문제를 제기할 만큼 일본도 민감한 상태다. 특히 이 문제를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할 것이라는 으름장을 여러 차례 놓았다.

한국이 수입 규제를 지속할 만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할 경우 일본은 WTO로 향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한국이 패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분석이다. 정부 관계자는 “양국 상황과 비슷한 판례를 분석해보면 100% 피제소국이 패했다”며 1997년 일본과 미국의 분쟁 사례를 소개했다. 당시 일본은 과수 피해를 유발하는 코들링 나방의 유입을 방지하기 위해 사과 등 미국산 농산품 8개에 대한 수입을 금지했지만 WTO는 미국 측 손을 들어줬다. WTO는 “일본 정부가 코들링 나방의 유입 경로에 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근거를 입증하지 못했다”고 일본 측 패소 이유를 설명했다.

일본산 수산물 수입 규제도 이와 비슷한 사례라는 설명이다. WTO 관련 지침은 “특정 위험에 따라 제품 수입 규제를 시행한 국가는 합리적 기간 이내에 수입 규제를 지속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다. WTO는 ‘합리적 기간’을 6개월로 권고하고 있다.

한국은 지난해 민간전문가위원회를 구성해 조사하고 있지만, 아직 수입 규제에 대한 근거를 정확하게 마련하지 못한 상태다. 이미 1년6개월이 지난 마당에 더 이상 시일을 끌기 어렵다는 얘기다.

○시민단체는 강력 반발

전 세계에서 기타 핵종의 추가 검사 증명서를 요구하는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는 점도 정부 측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외교부 관계자는 “국민 정서와 식품 안전을 고려해 최종 결정을 내려야겠지만 똑같은 수산물을 놓고 다른 나라들에 비해 과도하게 적용하고 있는 규제는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방사능 공포’가 채 가시지 않은 국민들이 이 같은 조치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여기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역사 왜곡, 독도 문제 등을 둘러싼 양국 간 갈등도 좀처럼 해소되지 않고 있다. 김혜정 환경운동연합 시민방사능감시센터 위원장은 “일본 해역 부근에서 서식하고 있는 어종들에 대한 안전성이 확실하게 입증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작정 수입 규제를 풀어선 안된다”고 말했다.

■ 세슘

인체에 가장 위험한 방사성 원소 중 하나. 물에 잘 녹아 토양이나 농작물 등에 쉽게 흡수되고 사람이 소량만 섭취해도 각종 암이나 유전장애를 유발하는 물질.

■ 기타 핵종

세슘, 요오드 등을 제외한 방사성 물질. 플루토늄 스트론튬 등이 이에 해당한다. 스트론튬은 골수암, 백혈병 등을 유발하고 플루토늄은 간, 폐 등을 손상시킨다.

세종=심성미/전예진 기자 smsh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