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닥 모르는 루블화 가치 > 루블화 가치가 달러 대비 사상 최저를 기록한 지난 3일 한 러시아 남성이 모스크바에 있는 환전소 밖으로 걸어나오고 있다.  루블화 가치는 올 들어 미 달러화 대비 60%, 유로화 대비 40% 이상 떨어졌다. 모스크바AFP연합뉴스
< 바닥 모르는 루블화 가치 > 루블화 가치가 달러 대비 사상 최저를 기록한 지난 3일 한 러시아 남성이 모스크바에 있는 환전소 밖으로 걸어나오고 있다. 루블화 가치는 올 들어 미 달러화 대비 60%, 유로화 대비 40% 이상 떨어졌다. 모스크바AFP연합뉴스
국제유가 하락에 따른 신흥국 통화가치 급락이 또 다른 글로벌 경제위기를 촉발할 수 있다는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디플레이션(물가 하락) 가능성이 점쳐지는 유럽 일본 중국 등의 경기가 이른 시일 내 살아나지 않으면 글로벌 경제가 ‘저유가의 덫’에 빠질 수 있다는 지적이다. 공급 과잉에서 시작된 유가 하락이 경기 둔화에 따른 원유 수요 위축과 맞물리면서 또다시 유가 하락을 부추기고, 결국 디플레이션을 초래하는 악순환이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다.

○‘D의 공포’로 무게 중심 이동

지난달까지만 해도 유가 하락이 글로벌 경제에 호재라는 분석이 많았다. 미국 내수시장의 경우 유가 하락이 수백억달러의 세금을 줄여주는 부양 효과를 낼 것이란 긍정적인 진단이 우세했다. 유가가 떨어지면 공장 운영, 항공기 운항 등에 필요한 유류비와 자동차 운전자의 기름값 부담이 줄어든다. 이렇게 절약한 만큼 소비가 늘 수 있다는 논리다. 워싱턴포스트는 “지금 유가 수준이라면 앞으로 1년간 미국 운전자들이 줄일 수 있는 비용이 2300억달러(약 255조원)”라고 분석했다.
[低유가 역풍] 국제유가 반년새 40% 추락…'체력 약한' 산유국 부도 공포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도 이달 초 “유가가 30% 떨어지면 선진국 경제는 0.8% 더 성장할 것”이라며 “내년 미국 경제는 낮은 유가에 힘입어 3.5% 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뿐 아니라 글로벌 경제에도 긍정적인 효과가 부각됐다. 미국 에너지정보국(EIA)은 유가가 배럴당 60달러대 중반으로 유지되면 한국은 내년 국내총생산(GDP)의 2.4%, 인도와 일본은 각각 1.8%와 1.2%를 높이는 효과가 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 간 분열과 글로벌 경제 둔화 전망으로 유가 하락세가 가팔라지자 유가 급락에 따른 부정적 여파에 대한 우려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유가 하락이 소비를 늘려주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지만 ‘디플레이션(D) 공포’를 초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 경제전문매체 마켓워치는 “역사적으로 보면 에너지 비용 부담 감소가 그대로 소비 증대로 이어지진 않았다”며 “오히려 유가 급락이 글로벌 경제 악화를 예고하는 징후가 돼왔다”고 지적했다.

○돈줄 마르는 산유국 파산 우려

유가가 2009년 이후 최저 수준으로 주저앉은 데다 추가적인 유가 하락 전망까지 잇따르면서 베네수엘라 등 돈줄이 말라가는 산유국들의 국가 부도 우려까지 나오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베네수엘라 국채 투자자들은 최근 국가 부도 사태가 발생할 경우 대처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베네수엘라 수출의 95%를 석유 상품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유가 하락은 베네수엘라 재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베네수엘라는 내년부터 2038년까지 1380억달러 규모의 외화 부채 만기가 돌아온다. 크레디트스위스는 “유가가 배럴당 97달러를 웃돌아야 베네수엘라가 채무불이행(디폴트) 사태를 피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베네수엘라뿐이 아니다. 재정의 대부분을 원유 수출에 의존하고 있는 나이지리아도 부도 가능성이 거론된다. 미국 경제방송 CNBC는 “나이지리아는 석유와 가스 수출에 재정 수입의 70%가 좌우된다”며 “유가 하락으로 인해 나이지리아의 경상수지가 내년에 적자로 돌아설 것”이라고 내다봤다.

우크라이나 사태로 서방 국가의 경제 제재와 유가 하락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는 러시아는 이미 경제위기 상황이라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8일(현지시간) 스위스 UBS그룹은 러시아 기업 7곳에 대해 주식 투자의견을 하향 조정했다. 러시아 증시는 최근 3거래일간 7.8% 떨어졌으며, 달러로 표시된 회사채 수익률은 이날 전 거래일 대비 1.65%포인트 오른 연 9.66%를 기록했다. 2009년 이후 최고 수준이다. 러시아 루블화 가치는 올 들어서만 39% 폭락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원유처럼 글로벌 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원자재 가격이 반년 만에 40% 이상 떨어지면 신흥국 통화가치 급락 등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있게 마련”이라며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의 시발점이 된 태국의 통화가치 하락 때도 그것이 미칠 영향을 제대로 예측하는 전문가가 없었다”고 지적했다.

김은정 기자 ke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