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초 만난 지하경제 양성화] '증거' 남는 금융거래 손 뗀다?…부자들 통장서 뺀 돈 88조 급증
지하경제 양성화를 위해 차명거래를 원천 금지하는 개정 금융실명거래법이 공포된 후 잔액이 1억원 이상인 은행 거액 개인예금 계좌에서 빠져나간 돈이 크게 늘어났다. 다른 사람 명의로 금융거래를 하던 사람이 줄었다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지만 ‘증거’가 남는 금융거래를 아예 하지 않겠다는 사람이 늘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일시적이나마 되레 지하경제를 활성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개인 장롱 속으로 이동 중”

24일 민병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실에 따르면 개정 실명거래법이 공포(5월28일)된 이후인 지난 6월부터 10월까지 국내 10대 은행의 잔액 1억원 이상 개인 계좌에서 인출된 돈은 모두 484조5467억원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 395조6581억원과 비교하면 22.4%(88조8886억원) 증가했다. 이 기간 입금된 돈은 감안하지 않은 채 단순히 인출된 돈만을 비교한 것이다.

지난 8월과 10월 0.25%포인트씩 기준금리가 인하돼 초저금리를 견디지 못한 자금이 이탈한 것이 주된 요인이지만 개정 실명거래법 시행일(11월29일)이 다가오면서 예금 인출을 부추겼다는 게 금융권의 분석이다.

한 시중은행 프라이빗뱅커(PB)는 “본인 계좌에 돈을 넣어 두자니 금융소득종합과세 대상이 되고, 자식 계좌에 분산 예치하려니 불법 차명거래에다 증여세 문제 때문에 아예 뭉칫돈을 빼가는 자산가가 늘고 있다”고 전했다. 빠져나간 돈의 일부는 개인 금고로 들어갔다는 게 PB들의 분석이다. 예전처럼 큰 수익을 얻을 수 있는 투자상품을 찾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차명거래에 따른 골치 아픈 문제까지 생각하면 차라리 당분간 장롱 속에 보관하겠다는 자산가가 늘고 있다는 설명이다.

한국은행의 지난 3분기 5만원권 환수율이 발행 첫 해인 2009년 이후 처음으로 10%대까지 떨어진 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개정 실명거래법이 시행되면 예금 이탈 현상은 가속화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업계 분석이다. 한 은행 관계자는 “지하경제를 양성화하겠다는 법의 취지는 좋지만 일시적으로 지하로 숨는 자산가들이 더 늘어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증여세 면제한도 활용해야

전문가들은 단순히 예금을 찾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특히 앞으로 본인 명의로 자금을 재예치해 금융소득이 갑자기 늘어나면 국세청으로부터 자금 출처 조사를 받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또 다른 은행 PB는 “과거 금융소득종합과세 누락분이 일시에 과세될 수도 있고, 사업자의 경우 현금 매출 누락 금액 등이 있다면 별도로 법인세, 소득세를 더 내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증여세 면제한도를 이용해 세금을 내지 않는 범위에서 증여를 하거나 증여세를 내고 증여하는 것이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성년(만 19세 이상)인 직계비속에 대해서는 5000만원(10년 누적)까지, 미성년 자녀에게는 2000만원까지 증여세를 내지 않고 증여할 수 있다.

김일규 기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