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 최고 밑천은 '대기업 경험'
지난해 매출 1000억원을 처음 넘어선 벤처기업의 35%가 대기업 출신이 창업한 것으로 조사됐다. 삼성 LG 등 대기업에서 갈고닦은 경험과 네트워크, 노하우를 토대로 창업한 기업인들이다.

한국경제신문이 지난해 ‘매출 1000억원 벤처기업’에 이름을 올린 56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인창전자 해성옵틱스 브이엘앤코 대신정보통신 등 20곳이 대기업 출신이 설립한 회사였다. 이들의 창업 시기는 1985년부터 2007년까지 다양했다.

삼성전자보다 영업이익률이 높은 회사로 알려진 인창전자는 삼성전자 생산관리실장을 지낸 유근수 회장이 1985년 창업했다. 지난해 매출 1084억원, 영업이익 265억원을 기록했다. 루이까스텔이란 브랜드로 알려진 브이엘앤코는 LG패션(현 LF) 출신 이재엽 대표가 2007년 창업했다. 지난해 매출 1204억원을 올렸다.

이들은 대기업에서 일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여러 사업 아이디어 가운데 ‘대기업이 직접 하기 힘든 사업’을 들고 나와 창업했다. 여기에다 조직 운영 노하우, 네트워크, 정보력, 관리능력을 접목해 성공 신화를 쓰고 있다.

전문가들은 직장 경험이 없는 일반 창업인보다 대기업 출신의 창업 성공 확률이 높다고 말한다. 네트워크나 사업 아이템, 업무 이해도, 정보력뿐만 아니라 기업가 정신에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동기 서울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대기업 출신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차근차근 기업가 정신을 키웠다”며 “기업가 정신이 있어야 다른 장점도 빛을 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작년 매출 2160억 나노스, 삼성전기가 포기한 사업 키워

창업 최고 밑천은 '대기업 경험'
대기업에 다니다 창업해 성공한 기업인 가운데 가장 많이 거론되는 인물은 김영찬 골프존 회장이다. 그는 삼성전자를 다니다 그만두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골프를 사업 품목으로 정해 창업했다. 지난해 3652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샐러리맨 신화를 쓰고 있는 김 회장은 “삼성전자에 다닐 때 ‘일본의 현장 경영’과 ‘미국의 전략 경영’에 대해 많이 배웠고 실천했다”며 “삼성에서 배운 것이 골프존 경영에 중요한 자양분이 됐다”고 말했다.

◆대기업서 배운 노하우 활용

나노스는 2005년 삼성전기 구매담당 상무였던 이해진 대표가 VCR 헤드사업부 인력을 데리고 나와 만든 회사다. 지난해 216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전년 매출(968억원)보다 두 배 이상으로 늘었다.

이 회사의 주요 생산품은 휴대폰에 들어가는 카메라 모듈과 필터, 전자부품 등이다. 나노스의 별명은 ‘스몰 삼성그룹(SSG)’이다. 이 대표는 “VCR사업부는 삼성전기 시절 회사 실적에 크게 기여하지 못하는 ‘미운 오리새끼’였다”며 “사양산업으로 경쟁력이 없다는 판단을 내린 VCR사업부를 떼어와 삼성에서 배운 시스템과 조직력, 중소기업만 가질 수 있는 빠른 결단력을 접목해 기업을 키웠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처음 1000억원 벤처기업에 이름을 올린 곳 중에는 나노스 등 삼성 출신이 다수 포진해 있다. 지난해 매출 증가율 상위권을 차지한 나무가(카메라 구성장치 생산)의 서정화 대표는 삼성전기, 광학장비 제조업체 필옵틱스의 한기수 대표는 삼성SDI, 영화 투자배급회사 넥스트엔터테인먼트의 김우택 대표는 삼성물산을 각각 다니다 그만두고 회사를 세웠다.

삼성전기 상무를 지낸 김지호 와이솔 대표는 “주력 제품인 소필터(통신에 필요한 주파수만 선택해 통과시키는 스마트폰 부품)는 국내에서 와이솔만 생산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기업 출신도 많다. 브이엔엘코와 아바텍, 픽셀플러스는 LG전자와 LG반도체 등 LG 출신이 세운 회사다. 이미지센서용 카메라렌즈를 만드는 코렌은 현대전자 멀티미디어연구소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이종진 대표가 세웠다. 대신정보통신 대의테크 디지털옵틱 등은 옛 대우 출신들이 창업한 회사다.

◆기업가 정신 키워온 게 비결

LG금속(현 LG니꼬동제련)을 다니다 1990년 산하물산을 세운 뒤 1000억원대 매출의 산하그룹을 키운 박성택 회장은 “대기업에 다닌다고 해서 무조건 기업가 정신이 길러지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회사 일을 내 일처럼 하면서 성공한 경험을 쌓았을 때 사업가 기질이 축적되고 기업가 정신이 생기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김영찬 골프존 회장은 “지금까지의 경험과 경력을 봐서 가장 잘할 수 있고 평생 해도 질리지 않을 일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확신이 선 뒤 창업하면 기업가 정신이라고 하는 ‘끊임없는 창의와 도전’ 의지도 생긴다”고 강조했다.

김정은/김용준 기자 likesmi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