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은행 재무담당 부장은 최근 금융당국에 공문을 보내 회계처리와 관련해 문의를 했다가 깜짝 놀랐다. 공문 발송을 철회하라는 연락을 받아서다. 국제회계기준(IFRS)에 따라 장부를 기재하는 과정에서 은행 판단에 대한 위법 또는 위규 여부를 묻고, 이에 대한 확인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금융당국은 대신 “알아서 판단하라”는 대답과 함께 ‘비조치의견서’를 줄 수 없으니 질의 공문도 철회해달라는 요구까지 했다.

A은행처럼 금융회사 임직원이 신규 영업이나 신상품 개발 과정에서 법령 또는 규정 위반 여부에 대한 사전심사를 요청하면, 금융당국이 이를 확인해주는 ‘비조치의견서(no action letter) 제도’가 도입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유명무실한 상태인 것으로 파악됐다.

비조치의견서 제도란 금융회사 등이 특정 행위가 법규에 위반되는지에 대해 금융당국에 심사를 청구하면, 금융당국이 회신해주는 제도다. 검토 결과 문제가 없으면 나중에 제재 등 법적인 문제 제기를 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사전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금융당국은 금융회사들이 나중에 제재를 우려해 신규 사업이나 자금 지원 등을 꺼리는 ‘보신주의’를 막기 위해 2001년 증권분야에 이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했다. 2005년에 전 금융권역으로 제도를 확대한 후 2006년엔 전자문서 접수 등 활성화 대책도 내놨지만 지금까지 이용 실적은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경제신문이 확인해본 결과 금융사들이 금융당국에 비조치의견서를 요청해 회신을 받은 사례는 지난 13년간 고작 12건에 불과했다. 수많은 요청에도 불구하고 1년에 채 한 건도 의견서를 내주지 않은 셈이다. 한 시중은행 부행장은 “요즘엔 신상품 판매나 회계 기준 등과 관련해 금융당국에 비조치의견서를 요청하면 오히려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을 정도”라고 말했다.

비조치의견서 제도가 유명무실해진 이유로는 절차의 복잡성과 홍보 부족 등이 꼽힌다. 한 카드사 사장은 “금융당국이 제도 활성화 자체를 원하지 않는 분위기”라며 “막상 요청하더라도 청구인의 인적사항 및 내용 등이 기재된 자료를 금융민원통합센터에 올리고 나면 추가 자료를 요청하는 경우가 많아 답을 기다리는 데만 몇 달씩 걸리기 일쑤”라고 꼬집었다.

금융회사 임직원들에게 ‘보증수표’를 내줬다가 나중에 부실이나 사고가 생기면 금융당국이 이를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 탓에 제도를 외면한 측면도 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비조치의견서를 내줬다가 문제가 발생할 경우 감사원 감사를 통해 지적받게 돼 이를 실행하기 쉽지 않은 게 사실”이라고 털어놨다.

장창민 기자 cm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