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규제 개혁의 틀을 ‘정부 주도’에서 ‘기업 주도’ 방식으로 바꾸기로 했다. 정부가 규제를 찾아내고 이를 완화·철폐해주는 방식으로는 분초를 다투는 국제 무대 경쟁에서 자국 기업이 살아남기 힘들다는 판단 때문이다. 또 기업 주도의 규제 개혁 방식으로 전환한 일본 아베 신조 정부가 차세대 자동차나 의료·건강 등 신성장 분야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내고 있는 것도 ‘자극제’가 됐다는 설명이다.
규제개혁 '발상의 전환'…기업이 代案 제시, 정부는 속전속결 처리
○닛산, 첨단기술 개발 숨통 터

지난 2월 일본 닛산자동차는 자동 운전자동차 개발 과정에서 심장마비 등 운전자 응급 상황에서 자동차가 스스로 인지하고 자동 정지하는 장치를 개발했다. 그러나 일본의 현행 자동차검사 제도에서 해당 차량이 검사를 통과할 수 있을지는 불분명했다. 닛산자동차는 곧바로 ‘그레이존 해소제도’를 통해 자동 정지장치가 규제 적용을 받는지 여부를 정부에 문의했다. 일본 정부는 차량 안전에 문제가 없다고 인증해 신기술 개발에 속도를 낼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줬다.

그레이존 해소제도가 없는 한국의 경우 이런 자동 정지장치를 개발하려면 이미 상당부분 개발이 진행된 뒤에야 차량 검사를 신청해 규제 적용 여부를 알 수 있다. 신규 사업을 준비하면서 각종 규제에 대한 불안감과 리스크 때문에 사업을 중도에 포기하는 사례가 많은 이유다. 막대한 자금을 들여 신기술을 개발해도 사전에 인지하지 못한 규제 때문에 투자금을 날리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레이존 해소제도 시행으로 기업이 정부 측에 규제 저촉 여부를 조회하면 정부는 한 달 이내 합법 여부를 알려줘야 한다. ‘특혜 시비’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대한상공회의소 무역협회 등에 전용 창구를 만드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적용 대상은 신기술과 신상품 개발, 판매 방식, 신규 투자 등으로 일본보다 폭넓게 적용된다.

○기업이 주도하는 규제완화 ‘주목’

규제가 발견되면 기업은 다시 ‘기업 제안방식 규제개선제도’를 이용해 정부에 규제 적용 예외를 요청할 수 있다. 기업이 불필요한 규제를 찾아내 대안을 제시하고, 정부는 규제의 본래 취지를 넘어서지 않으면 인증해 주는 시스템이다. 관료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기업의 창의성을 활용하자는 차원이다.

일본도 이와 비슷한 제도인 ‘기업실증 특례제도’를 지난 1월부터 시행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예를 들어 올해 초 도시바 등 일본 제조업체 4곳은 반도체 공장에서 사용되는 가스 용기 안전 검사에 초음파 검사 방식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반도체 제조에 직접 쓰이지 않는 가스 용기의 경우 초음파 점검을 하더라도 안전에 큰 지장이 없다고 판단해 특례 조치를 승인했다. 이로 인해 가스 용기의 검사 기간이 수개월에서 단 하루로 줄어들었다.

기업 제안방식 규제개선제도를 통한 규제 완화나 폐지 또는 특례를 원하는 기업은 투자계획, 일자리 창출 등의 내용을 담은 사업계획서와 함께 규제를 풀 수 있는 대안을 정부 측에 제시해야 한다. 정부는 이에 대해 2개월 이내 시행령이나 시행규칙 개정 등 필요조치를 내릴지 판단하게 된다.

정부는 그레이존 해소제도와 기업 제안방식 규제개선제도를 개정 중인 행정규제기본법 안에 별도로 넣을 예정이다. 정부 관계자는 “공무원 입장에서도 행정규제기본법 안에 명시돼 있으면 개별 기업에 대한 특혜 시비 우려 없이 적극적 행정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세종=김우섭 기자 dute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