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저축은행 '충당금 폭탄' 불가피할 듯

사상 최대규모의 대출사기 범행에 연루된 KT ENS가 12일 법정관리(기업회생절차)를 신청하자 이 업체에 돈을 빌려준 금융회사들은 '뒤통수를 맞았다'며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법원이 법정관리 신청을 받아들이면 즉시 모든 채권이 동결돼 대출사기의 피해액 일부는 영영 돌려받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결국 KT ENS가 금융권에 대한 배상책임을 피하려는 '꼼수'를 쓴 게 아니냐는 반응이다.

피해규모가 가장 큰 하나은행 관계자는 "한 마디로 황당하다"며 "KT ENS 측으로부터 어떤 연락도 받지 못했으며, 언론 보도를 보고 나서야 법정관리 신청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다.

농협은행 관계자도 "법정관리 신청이 이해가 안 된다"며 "전혀 예상하지 못해 어떻게 대응할지 논의 중이다"고 말했다.

KT ENS는 법정관리 신청 사유를 이날 만기가 돌아온 기업어음 491억원을 막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밝혔지만, 은행들은 사실상 '꼬리 자르기'라는 의심을 하고 있다.

특히 은행들이 그동안 KT ENS의 지분을 100% 보유한 모회사 KT가 법적인 책임 유무를 떠나 도의적인 책임, 즉 증자 등으로 KT ENS의 배상을 지원해줘야 한다는 태도를 보여왔다는 점에서 이번 법정관리 신청의 이면에 '뭔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중앙티앤씨, 엔에스쏘울 등 대출사기를 주도한 협력업체와의 매출채권확인서를 내용증명으로 KT ENS 대표이사 앞으로 보낸 만큼 KT ENS가 이를 몰랐을 리 없다"며 "소송으로 갈 경우 은행에 돈을 물어내야 할 처지가 되자 법정관리를 신청해버린 게 아니냐"고 비난했다.

하나은행은 KT ENS의 법정관리가 개시되면 법원에 매출채권을 신고하고, KT ENS가 종전처럼 매출채권의 존재를 부인하면 지급채무를 이행하라는 소송을 낼 방침이다.

234억원의 피해를 본 BS저축은행을 비롯해 OBS저축은행, 현대저축은행, 인천저축은행, 우리금융저축은행, 아산저축은행, 민국저축은행, 공평저축은행, 페퍼저축은행 등도 800억원가량의 피해액 회수를 위해 소송을 준비 중이다.

금융회사들은 이번 대출사기의 피해액을 장부상 손실에 일부 반영, 대규모 '대손충당금 폭탄'을 맞았다.

하나은행 1천624억원을 비롯해 국민은행 297억원, 농협은행 297억원 등을 모두 회수 가능성이 불투명한 '고정이하' 채권으로 분류해 대출금의 70~100%를 충당금으로 쌓았다.

저축은행의 한 관계자는 "회사의 생사를 좌우할 규모는 아니지만, 당기순이익에 큰 타격을 받았다"며 "일단 소송 등의 절차를 고려해 75%의 충당금을 반영했다"고 말했다.

KT ENS의 법정관리가 개시되면 은행들은 이해관계인 회의 등에 참석해 가능한 한 피해액을 회수할 방침이다.

회수 과정에서 은행 간 갈등이나 소송의 여지도 있다.

하나은행은 한국투자증권·신한금융투자의 매출채권 지급보증분을 제외하고 충당금을 적립했다.

지급보증에 해당하는 금액은 이들 증권사에서 받겠다는 뜻으로, 허위 매출채권에 따른 지급보증 책임을 부인하는 증권사들과의 소송 가능성이 있다.

50%씩 공동투자하는 과정에서 신탁자산의 관리책임을 두고 농협은행과 공방을 벌인 바 있는 국민은행 관계자는 "일차적으로 KT ENS가 책임을 져야 한다"며 "책임을 안 질 경우 농협은행 쪽과 얘기를 해볼 계획"이라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홍정규 고유선 홍국기 기자 zheng@yna.co.krcindy@yna.co.krredfla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