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출채권이 대출사기의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 16개 금융회사가 KT ENS 협력업체들이 제시한 가짜 매출채권에 속아 3000억원을 피해본 데 이어 한국씨티은행도 디지텍시스템스 임원이 위조한 매출채권으로 인해 1700만달러(약 180억원)의 피해를 보게 됐다. 이 과정에서 금융사들은 KT와 삼성전자라는 대기업을 과신한 것으로 나타나 여신심사를 소홀히 하고 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씨티은행서도 180억 대출사기] 또 매출채권 위조…대기업 간판 믿고 돈 내주는 관행 禍 불러

○이번엔 해외 매출채권 위조

한국씨티은행에서 발생한 대출사기는 KT ENS 협력업체들이 벌인 대출사기처럼 매출채권을 위조했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KT ENS 협력업체들은 국내에서 물품을 납품한 것처럼 꾸민 반면 디지텍시스템스는 삼성전자 중국법인과 베트남법인에 수출한 것처럼 서류를 위조했다는 점이 다르다.

스마트폰 등에 쓰이는 터치스크린 등을 제조하는 코스닥 상장업체인 디지텍시스템스는 작년 초부터 삼성전자 해외법인에 물품을 수출했다. 한국씨티은행은 삼성전자가 발행한 해외 매출채권을 사들이는 방법(해외 매출채권 팩토링)으로 돈을 빌려줬다. 문제가 발생한 것은 지난 1월9일이다. 실제보다 많은 금액이 청구되자 삼성전자에서 지급을 거부했다. 한국씨티은행은 결국 디지텍시스템스의 최고재무책임자(CFO)가 지난해 11~12월 매출채권을 위조했다는 것을 알아냈다.

한국씨티은행은 디지텍시스템스가 삼성전자에 납품한다는 사실만 믿고 관행적으로 대출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구매 기업만 믿고 빌려줘

금융당국은 매출채권과 관련한 사고가 이어지자 개선할 부분은 없는지 살펴보고 있다. 금융감독원은 전 금융권을 대상으로 매출채권 운영 실태에 대한 점검에 들어갔다.

해외 매출채권 팩토링도 외상매출채권 담보대출처럼 납품업체와 구매 기업, 은행 등 3자가 신용을 바탕으로 하는 거래다. 눈에 보이는 담보 없이 두 기업 간 실제 거래가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은행이 돈을 빌려주는 것이다. 은행들은 매출채권을 주고받는 기업들이 의도를 가지고 채권을 위조할 경우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신용도가 낮은 회사와는 거래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 사건도 삼성전자라는 굴지의 대기업이 있어 한국씨티은행이 의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게 금융권의 분석이다. 납품업체의 현금 흐름 등 신용도는 거의 확인하지 않고 구매 기업이 대기업이면 그것만 믿고 대출해주는 관행에 속았다는 지적이다.

은행 내부 규정에는 유선 확인 및 직접 방문으로 매출채권의 진정성을 확인해야 한다고 돼 있다.

김일규/박신영/허란 기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