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에도 등급이 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기업 간 부당 담합 근절을 위해 운용하고 있는 리니언시 제도가 대표적이다. 부당 담합 사실을 먼저 실토한 1, 2순위 기업은 과징금 감면과 함께 검찰 고발조치를 면하지만 나머지 기업들은 철퇴를 맞는다. 하지만 신고만으로 순위가 고정되는 것은 아니다. 언제든 바뀔 수 있다. 그에 따라 기업들의 명암도 극명하게 엇갈린다. 순위 변동을 놓고 소송까지 불사하는 이유다.

2007년 담합에 함께 참여한 34개 동종업체 몰래 공정위에 위법 사실을 먼저 신고한 A사. 1순위로 65억원 상당의 과징금을 면제받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어 B사가 두 번째로 담합 사실을 실토했다. 하지만 이듬해 공정위는 A사와 B사의 리니언시 자격을 박탈하고 C사에 1순위를 부여했다. 늦게 달려온 C사의 신고 내용이 A사와 B사가 제출한 내용보다 훨씬 광범위한 담합 사실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정위는 A사와 B사가 고의로 담합을 축소 신고했다고 봤다. A사는 리니언시 1순위를 되찾기 위해 곧장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지난해 5월 서울고등법원은 일부 품목이긴 하지만 A사의 우선순위를 인정해줬다. 그러자 이번에는 공정위가 항소했고 내년 상반기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다.

한국유리공업도 1순위를 박탈당해 땅을 치고 있다. 이 회사는 건축용 판유리 가격을 담합한 사실이 드러나 지난 6월 159억7000만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2009년 3월 공정위에 1순위로 담합 사실을 자진 신고했지만 주어진 기간에 증명자료를 내지 못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공정위는 리니언시 기업에 대해 신고 후 75일 내 관련 증거를 제출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1순위는 뒤늦게 신고한 KCC의 차지였다. 한국유리공업은 공정위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지만 서울고등법원은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다.

담합에 대한 경쟁당국의 강력한 단속과 제재로 리니언시 제도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가운데 이처럼 1, 2순위를 둘러싼 기업들의 법정다툼도 늘어나고 있다. 지금까지 확인된 것만 10건에 육박한다. 소송 내용도 리니언시 지위확인 다툼, 추가 감면제도의 과징금 감경률 산정 등 다양해지고 있다. 신영호 공정위 카르텔총괄과장은 “성실한 자료 제출이 가장 중요하다”며 “리니언시 제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일부 담합 사실만 신고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해외에 비슷한 담합 사건이 있었거나 외국계 기업이 연루된 담합건의 경우 발빠른 대응(?)이 필요하다고 귀띔했다. 한 공정거래법 전문 변호사는 “일단 공정위 조사가 들어오면 아무도 믿어서는 안된다”며 “실제 담합한 업체들이 공동으로 변호사를 선임해 대응하는 경우에도 몰래 다른 변호사를 통해 자진 신고하는 기업들도 있다”고 말했다.

최근엔 ‘엠네스티 플러스(추가감면제도)’에 대한 소송도 늘고 있는 추세다. 담합 조사를 받던 기업이 또 다른 담합 사실을 실토할 경우 나중에 신고한 담합 관련 매출에 따라 앞선 담합의 과징금을 감면해주는 제도다. 예를 들어 공정위 고시는 리니언시 기업이 두 건의 서로 다른 담합을 저지른 뒤 첫 번째 건은 리니언시 혜택을 받지 못하고 과징금 금액이 비슷한 또 다른 건의 담합을 1순위로 실토할 경우 1순위 실토 건에 대해 과징금 100%, 1·2순위에 들지 못한 건에 대해 20%를 감면토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 고시는 세 건 이상의 복수 담합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없어 소송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총 9건의 담합에 참여, 1~7번째 담합건에 대해선 리니언시 혜택을 받지 못했지만 8~9번째 담합은 자진 신고에 성공(?)한 D사가 대표적이다.

공정위는 8~9번째 담합에 대해서는 과징금을 전액 면제해주고 1~7번째 담합에 대한 과징금은 1~7번째 담합 관련 매출의 총합과 8~9번째 담합 관련 매출 총합을 따져 고시가 정한 비율대로 감액해 주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D사는 1~7번째 담합과 8~9번째 담합건을 덩어리로 비교할 것이 아니라 건별로 떼어서 해당 회사에 유리한 비율대로 감액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2011년 10월 서울고등법원은 D사 승소 판결을 내렸지만 지난달 14일 대법원 판결에서는 공정위가 재량껏 판단할 수 있는 사안이라며 공정위의 손을 들어줬다.

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

■ 리니언시

담합 사건에 연루된 기업이 공정거래위원회에 위법 사실을 자진 신고하면 과징금, 검찰 고발 등을 면제해주는 제도. 가장 먼저 신고한 1순위 기업은 과징금 100%, 2순위는 50%를 깎아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