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 대출보다 회사채·CP로 … '은행 주도 구조조정' 안 통한다
채권단 주도의 기업 구조조정이 삐걱거리고 있다. 채권단 간 이견으로 시간을 끄는 사이 기업들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무너지곤 한다. 전문가들은 기업구조조정촉진법 등 외환위기 이후 도입된 구조조정제도가 은행 의존도가 낮아진 기업의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런 만큼 단기적으론 강력한 컨트롤타워를 제도화해 채권단이 공동으로 손실을 분담토록 하되, 중기적으로는 시장 주도의 구조조정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다.

◆시장 주도 구조조정 바람직

김홍태 산업은행 기업구조조정부장은 “외환위기 직후에는 대부분 기업의 차입금 중 90%가량이 은행빚이어서 은행에 구조조정을 주도할 힘이 있었는데 최근엔 시장성 여신 비중이 50~60% 수준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은행이 기업을 강제할 힘이 약해졌다”고 분석했다.

외환위기 때와 달리 구조조정 대상 기업이 건설 조선 해운 등 경기 민감 업종에 몰려 있어 신규 자금 지원 효과가 떨어지는 것도 문제로 꼽힌다. 이기준 신한은행 기업개선본부장은 “경기 침체로 어려워진 업종에는 신규 자금을 넣어도 회사가 수주를 더 해서 자생력을 갖추기 어려운 구조”라고 지적했다.

이성규 유암코 사장은 “외환위기 후 금융권이 선진화되자 의사 결정의 책임을 따지고 주주 권리 등을 강조하면서 이전처럼 은행이 ‘국가 경제를 위한다’는 소명의식만으로 구조조정을 주도하기가 어려워졌다”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중·장기적으로는 은행 주도에서 시장이 주도하는 구조조정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적지 않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사모펀드의 역할을 강화하고 인수합병(M&A)을 통해 시장에서 자연스럽게 부실기업이 퇴출되거나 다른 기업에 흡수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조 리스크컨설팅코리아 사장은 “선진국처럼 벌처펀드나 구조조정전문회사 등이 나와서 부실기업을 정리하는 역할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조조정 컨트롤타워 필요


하지만 ‘시장 주도 구조조정’으로 당장 옮겨가는 데는 무리가 있다. 아직 국내 M&A 시장이 충분히 형성되지 않은 데다 구조조정전문회사 등에도 전문 인력이 크게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과도기적으로 상시·선제 구조조정 컨트롤타워를 운영할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동양그룹 사태에서 보듯이 은행권 여신이 많지 않지만 경제 전체에 충격을 줄 수 있는 기업 등의 상황을 자세히 살펴 미리 대응할 수 있는 리더십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은행권에 손실 분담과 자금 지원을 강제하는 대신 아예 공적 구조조정기구를 만들어 이 기능을 맡겨야 한다”(전삼현 숭실대 교수)는 주장도 나온다.

◆‘손실 분담’ 원칙 세워야


구조조정 과정에서 채권단이 공정하게 손실을 나누는 것도 중요한 화두다. 현 제도 아래에선 워크아웃이나 자율협약에 참여하지 않는 이들이 채권단의 고통 분담을 바탕으로 채권 회수 등 ‘과실’만 따먹을 수 있다. 회사채 투자자 등 비협약 채권자들과 반대매수청구권을 행사하고 이탈한 채권단이 이런 종류의 무임승차자로 꼽힌다.

이성규 사장은 “은행들이 신규 자금을 투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들어간 돈이 투자나 인력 구조조정 등에 쓰이는 게 아니라 회사채 등을 갚는 데 사용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모든 채권자를 아우르는 법정관리처럼 워크아웃·자율협약 때도 비협약채권자에 일정한 손실 분담을 요구할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많다.

한시법인 기업구조조정촉진법을 상시화하고 채권단의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신진기 우리은행 기업개선본부장은 “기업구조조정촉진법상 채권금융회사협의회에 신용협동조합 새마을금고 등 제2금융권을 더 많이 참여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아예 기업을 살리는 데 초점을 둔 기업구조조정촉진법과 채권자에 대한 공정한 자산 배분을 목표로 하는 통합도산법의 기능을 섞어 제3의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나종선 우리은행 강남지점장(전 기업개선부장)은 “통합도산법에 따라 모든 채권자가 참여하는 회생절차를 진행하되, 사후 관리는 워크아웃제도처럼 채권단이나 별도의 전문관리회사가 맡아서 회사의 경영을 정상화할 수도 있다”고 제안했다.

이상은/박신영 기자 se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