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엔低 위기와 한국 경제의 진로
일본 정부의 공격적인 엔저 드라이브로 달러당 110엔도 먼 얘기만은 아닌 상황이 됐다. 엔저 영향으로 우리와 경쟁관계인 일본 기업들의 수익성이 현저히 개선되고 있다. 도요타자동차는 2012 회계연도 순익이 3배 늘었고, 소니는 5년 만에 순익이 흑자로 돌아섰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한국이 엔저의 최대 피해자’라는 우울한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엔고 이익을 누려온 한국 경제의 호시절은 끝났다.

엔저 파고는 차제에 한국 경제의 근본적 체질 개선을 요구한다. 이번 위기를 생산성 향상이나 기업 리스트럭처링 없이 환율 대책만으로 대응하는 것은 위험하다. 한·일 간의 구조적 불균형을 제대로 시정하기 어렵고, 조만간 미국·유럽 등의 출구전략이 본격화될 때 상당한 어려움에 봉착할 가능성이 크다.

일차적으로 엔저 충격이 큰 자동차, 철강, 가전, 섬유, 기계 등 5대 업종을 중심으로 자생력 강화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 원가절감, 환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환헤지 파생상품 투자 확대, 결제 다변화, 해외공장 생산 확대 등 실효성 있는 대응책이 강구돼야 한다. 특히 중국 수출에 미칠 파장을 최소화해야 한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일본은 자동차, 기계, 철강 부문에서 가격경쟁력이 커지고 반도체, 조선, 정밀기기 분야에서 격차가 줄고 있다.

다음으로 주력 제조업의 생산성 향상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 최근 언스트앤영 한영회계법인 조사에 의하면 화이트칼라층의 46%가 자신의 생산성이 낮다고 생각하고 있다. 근로시간, 업무처리방식 등에서 경쟁국에 뒤지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노동생산성 국제 비교에 따르면 2011년 우리나라는 34개 국가 중 27위에 그치고 있다. 제조업은 19개국 중 2위로 높은 반면 서비스산업은 22개국 중 20위로 최하위권이다. 시간당 생산성도 28위에 머무르고 있는 실정이다.

글로벌 스탠더드에 부합하는 고용유연성 제고도 중요하다. 고용유연성 제고→경쟁력 향상→성장·고용 촉진으로 이어지는 선순환구조가 제대로 작동될 때 일본과의 생산성 격차가 줄어들 수 있다. 실질임금이 일본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높은 상황에서 고용규제 완화는 최소한의 경쟁력 회복 조치다. OECD 자료에 따르면 고용유연성과 고용률은 밀접한 상관성을 보여준다. 최근 3년간 미국 제조업은 50만명의 새 일자리를 만들어냈다. 진 스퍼링스 미 국가경제위원장 말처럼 유연한 고용관계가 ‘제조업의 르네상스’를 가져온 주요인으로 평가된다.

대·중소기업 연계형 성장전략을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대기업이 투자·연구개발 로드맵을 제시하고 중소기업이 장비, 부품소재, 소프트웨어 등 연관 분야에서 공조하는 시스템이 활성화돼야 한다. 최근 삼성이 미래기술육성재단을 설립해 기초, 소재, 정보통신 융합 기술 개발을 선도하겠다는 구상이 좋은 롤모델이 된다. 부품, 소재, 반제품은 대일 무역적자의 주범이며 글로벌시장에서 한·일 중견기업끼리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부문이다. 글로벌 선도기업의 70~75% 수준인 유망 중견기업의 기술력을 높이고 취약한 글로벌화와 기술경영 인프라를 보강해야 한다. 특히 중국과의 제조업 기술격차는 2011년 기준으로 3.7년에 불과하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치이는 ‘넛 크래커’가 되지 않기 위해서도 기술혁신이 절실하다.

피부에 와닿는 과감한 서비스시장 개방과 육성이 시급하다. 서비스시장 개방은 일본과의 무역마찰을 최소화하면서 우리 경제에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제공한다. 의료, 교육, 보건, 금융 등 공공서비스와 비즈니스 서비스 부문에 대한 규제철폐와 문호개방은 새로운 사업기회와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유용한 신성장공식이 될 수 있다.

싱가포르가 마리나베이 카지노 허용, 매사추세츠공대(MIT)와 같은 유수 교육기관 유치와 글로벌 바이오 허브 조성 등으로 중진국 허들을 극복한 것은 우리에게 타산지석이 아닐 수 없다. 맥킨지 보고서가 주장하는 ‘뜨거워지는 물속의 개구리’ 처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이번 엔저 사태가 한국 경제의 참모습을 직시하는 진실의 시간(moment of truth)이 되길 기대한다.

박종구 < 한국폴리텍대학 이사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