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달러 환율 100엔 시대] 日 중앙은행을 '돈 찍는 기계'로…'헬리콥터 벤' 뺨친 아베
엔고(高)는 오랜기간 일본 경제의 발목을 잡았다. 작년 가을까지만 해도 사상 최고 수준인 달러당 70엔대 후반을 오르내렸다. 고질병에 과감하게 메스를 댄 건 아베 신조 총리였다. 취임 후 단 5개월 만에 엔화가치를 20% 이상 떨어뜨렸다. 100엔이라는 심리적 저항선도 가볍게 뚫어냈다. 이전과는 접근법이 달랐다. 구두개입의 강도나 양적완화 규모 모두 시장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때마침 미국 경기가 살아난 것도 엔고 탈출 기간을 단축시킨 요인이다.

○금기 무너뜨린 발언

그동안 외환시장이 요동칠 때마다 일본 외환당국은 매번 시장에 경고성 메시지를 던져 왔다. 레퍼토리는 단순했다. “시장의 투기세력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무리한 구두개입으로 인한 부작용과 외국의 시선을 우려해서였다.

그러나 아베는 달랐다. 앞뒤 재지 않았다. 일본 자민당 총재로 당선된 뒤 본격적으로 중의원 선거전에 돌입한 작년 11월17일. 아베는 향후 금융정책에 대한 질문에 “윤전기를 쌩쌩 돌려서라도 무제한으로 돈을 찍어내겠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정부가 발행하는 국채를 시장을 거치지 않고 일본은행이 직접 매입하도록 하겠다는 방안도 시장에 슬쩍 흘렸다. 중앙은행을 아예 ‘돈 찍는 기계’로 활용하겠다는 얘기였다. “헬리콥터로 돈을 뿌려서라도 경기를 살리겠다”고 말해 ‘헬리콥터 벤’으로 불렸던 벤 버냉키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보다 몇 걸음 더 나간 것이다. “디플레이션 탈출이라는 목표에 동의하는 사람을 차기 일본은행 총재에 임명하겠다”는 말도 공공연히 내뱉었다. ‘중앙은행의 독립성’ 같은 고상한 목표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구로다 하루히코 신임 일본은행 총재도 마찬가지였다. 임명동의안 처리를 앞둔 중의원(하원)에 출석해 “디플레이션 탈출을 위해서는 뭐든지 하겠다”고 못을 박았다. 구구절절한 설명보다 ‘뭐든지 하겠다’는 한마디의 말이 더 셌다.

○단순한 목표의 파괴력


아베 총리
아베 총리
시장에 던진 메시지가 단순 명료했다는 것도 과거와 달라진 대목이다. 지난달 4일 구로다 총재는 아베 정권 출범 후 첫 금융완화정책을 발표하면서 유독 ‘2’라는 숫자를 강조했다. 물가상승률을 ‘2년’ 안에 ‘2%’로 높이기 위해 시중 통화량을 ‘2배’로 늘리고, 장기국채 보유액도 ‘2배’로 확대하겠다고 설명했다. 금융완화정책에 ‘차원이 다른(異次元)’이라는 수식어도 붙였다. 요미우리신문은 “단순한 목표 제시가 시장의 분위기를 바꾼 원동력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출범 초기부터 아베 총리의 경제정책은 알아듣기 쉬웠다. 대표적인 것이 ‘3개의 화살’이다. 디플레이션 탈출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금융완화와 재정확대, 성장동력 확보 등 세 가지 전략을 적극 추진하겠다는 뜻을 이렇게 표현했다.

아베 총리의 경제정책(아베노믹스)을 일선에서 진두지휘하는 주요 관료와 여당 인사들에게도 명확한 지침을 내렸다. “오는 7월 참의원 선거까지는 ‘경제’로 간다”는 게 골자였다. 그리고 “참의원 선거 때까지는 (주요 현안이) 예산뿐이니까 중요한 법안은 내지 말라”며 경제에 초점을 맞춘 정책을 주문했다.

아베 총리는 중의원 선거 이전에 이미 경제에 방점을 찍은 한 장짜리 ‘공정표’를 꼼꼼하게 준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공정표에는 ‘12월26일 첫 국무회의에서 총리 지시’, ‘1월 중순 비상 경제대책 결정’, ‘1월31일 국회 소집·추경 예산안 제출’ 등 구체적인 날짜와 함께 추진할 과업을 명시했다. 아사히신문은 “정기국회 소집이 예정에 비해 사흘 앞당겨진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대로 실현됐다”고 전했다.

○맞아떨어진 타이밍

화폐가치는 상대적이다. 한쪽 손만 움직여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아베의 엔저 유도 정책은 그런 점에서 타이밍이 적절하게 맞아떨어졌다. 최근 들어 미국 경기가 회복세에 접어들었다는 징후가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고용지표. 미국의 지난주 실업수당 첫 청구건수는 전주 대비 4000건 줄어든 32만3000건으로 집계됐다. 5년4개월 만에 최저 수준이다. 미국이 중국 경제권 확대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 정부의 양적완화정책을 어느 정도 용인하는 쪽으로 방침을 정한 것도 엔화가치 하락에 도움이 됐다는 분석이다.

일본 기업들은 날개를 달았다. 도요타자동차의 작년 회계연도(2012년 4월~2013년 3월)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3.7배 늘어나는 등 수출기업을 중심으로 실적 개선이 본격화하는 움직임이다. 일본 다이와증권은 엔·달러 환율이 달러당 100엔을 유지할 경우 일본 200대 기업의 올 회계연도(2013년 4월~2014년 3월) 세전이익이 전년 대비 75% 늘어난 16조900억엔(약 175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도쿄=안재석 특파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