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경영학] '돈 세탁소' 오명 쓴 HSBC, '걸리버 리더십'으로 세계 1위 탈환
2008년 멕시코에서는 HSBC를 두고 ‘돈 세탁소’라는 비난 여론이 고조됐다. 이때만 해도 HSBC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2년 뒤엔 태연할 수 없었다. 2010년 1월 멕시코 마약 밀매 사건에 연루됐다는 의혹이 확산돼서다. 미국 수사당국을 통해 HSBC 멕시코지사가 콜롬비아 마약 조직의 돈세탁 창구로 이용됐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을 맞게 됐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곧바로 고객 정보 유출 사고가 터졌다. 2010년 3월 HSBC 스위스 제네바 지점의 한 직원이 당시 프랑스 재무장관이었던 크리스틴 라가르드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에게 2만여명의 고객 명단을 넘긴 일이 알려졌다. 탈세자 소탕에 협력한 것뿐이라고 해명했지만 고객 정보를 마음대로 내주는 은행이라는 오명을 피해갈 수 없었다.

1865년 창립 이래 최대 위기에 빠진 이때 등장한 이가 스튜어트 걸리버 현 HSBC 최고경영자(CEO)였다. 정통 HSBC맨인 걸리버 CEO는 2011년 1월 CEO로 부임한 뒤 2년여간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통해 HSBC의 부활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수익성은 3분의 1 토막

걸리버 CEO가 HSBC를 맡을 때만 해도 경영 상황은 최악이었다. 연이은 악재에 고객 신뢰도에만 금이 간 게 아니었다. 2008년 금융위기 전과 비교해 HSBC 수익성은 3분의 1 수준으로 곤두박질쳤다. 매년 16%씩 시가총액이 늘어날 정도로 고속 성장의 대명사로 통하던 HSBC의 명성은 오간 데 없었다.

세계 84개국에 진출, 명실상부한 글로벌 은행으로 발돋움했지만 이익을 내지 못하는 곳이 수두룩했다. 2009년부터 허리띠 졸라매기를 시작했지만 자산만 2조달러가 넘는 공룡 은행이 하루아침에 바뀌진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또다시 금융범죄에 휘말렸다. HSBC 미국 지사가 알 카에다 같은 테러 조직을 후원해온 사우디아라비아와 방글라데시의 은행들과 거래한 사실이 드러났다. 북한이 미국의 금융제재를 받았던 2005년과 2007년 사이, HSBC가 북한에 계좌를 제공했다는 점도 뒤늦게 밝혀졌다.

걸리버 CEO는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고 판단했다. 세계 8000여개 지점에 30만명이 근무하는 방대한 조직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대형 사고는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고 봤다. 동시에 ‘현지화’라는 이름으로 국가별로 제각각 운영되는 독립 경영 체제가 과연 효율적인지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곧바로 대수술에 착수했다.

○일관성 있는 사업조정

걸리버 CEO는 문제 해결의 기법으로 변화를 주창했다. 1980년 HSBC에 입사한 뒤 런던, 홍콩 등 다양한 곳에서 근무하며 느낀 문제점을 하나둘씩 고쳐 나갔다.

먼저 중구난방이었던 사업 포트폴리오를 정리했다. 미국 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업이 첫 대상이었다. 아시아에서 확장해온 프라이빗뱅킹(PB) 사업과 상충됐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저신용자 대상으로 사업을 하고 아시아에서는 부자 고객 위주로 영업을 하다 보니 시너지도 나지 않고 불필요한 비용 지출도 많았다.

걸리버 CEO는 “전 세계 어디서나 모든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던 관행에서 벗어나 우선순위에 따라 수익성 높은 시장에 집중하는 전략으로 선회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걸리버 CEO는 돈을 벌지 못하는 사업은 과감하게 정리했다. 미국 신용카드 사업을 캐피털원에 팔고 사업성이 없는 뉴욕 일부 지점을 퍼스트나이아가라에 매각했다. 이런 식으로 2년간 총 28개 사업에서 철수했다.

동시에 84개국에서 개별 은행처럼 운영되던 HSBC 조직을 유기체로 바꿨다. ‘하나의 은행(one bank)’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4개 사업부문, 10개 기능조직으로 재편했다. 2008년 33만명이 넘었던 임직원 수도 2012년엔 27만명으로 줄였다. 직원들과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인력 감축에서 나오는 잡음을 최소화했다. 이와 함께 15단계까지 거치던 보고 체계를 8개 이하로 줄이는 등 스피드 경영을 추구했다.

○성공 핵심 요인은 강력한 리더십

HSBC 안팎에서 걸리버의 실험은 성공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2008년 65억달러까지 떨어졌던 HSBC 순이익은 2011년 이후 150억달러 이상으로 회복됐다. 올 들어서 런던시장에 상장된 주식 가치가 45%가량 올라 시가총액 기준으로 2년 만에 세계 3위에서 1위 은행으로 발돋움했다.

걸리버 CEO의 강력한 리더십이 HSBC 위상을 끌어올린 첫째 요인이다. 걸리버 CEO는 소통을 중시했다. 최고경영진들과 현실 인식을 공유한 뒤 전 세계 상위 1%급 관리자 2500여명과 토론하면서 그룹의 나아갈 방향을 모색했다. 여기서 수렴된 의견을 국가별 리더 2만5000명과 다시 얘기했다. 마지막으로 전 세계 직원들에게 그룹 비전을 설명했다. 이런 4단계 소통 방식을 통해 직원들로부터 변화의 공감대를 형성한 것도 성공 비결로 작용했다.

점진적 변화가 아닌 과감한 혁신으로 조직을 바꾼 점도 변화의 동력이 됐다. 조직 내 만연해 있던 비효율성을 타파하기 위해선 환부를 한 번에 도려내야 한다고 여긴 걸리버 CEO의 통찰력이 주효했다.

그는 또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지 않았다. 한 국가에서 성공하기 위해선 최소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보고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투자 결정을 했다. 20여년 동안 끈질기게 투자해 결국 자리를 잡은 베트남 영업이 대표적인 예다.

HSBC는 표준화된 성과관리 지표를 활용해 사업 및 구조조정을 진행했다. 체계적으로 성과를 관리하고 평가 과정에서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다.

이런 다섯 가지 성공 요인이 어우러져 HSBC가 일사불란한 조직으로 거듭나 세계 최대 은행으로 재도약한 셈이다.

박상순 BCG 파트너/정인설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