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2월 말 이윤우 삼성전자 반도체개발실장(현 삼성전자 고문)은 직원들과 함께 일본 샤프를 방문했다. 반도체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그해 2월8일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반도체 사업에 본격 진출한다는 ‘도쿄선언’을 발표했고 삼성 기술진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샤프였다. 30년 만에 상황은 역전됐다.

삼성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일본 기업의 역할은 컸다. 이건희 삼성 회장이 연말연초에 일본에 머물며 지인들을 만나고 경영 구상을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일본을 빼고는 삼성의 역사를 말하기 어렵다고 할 정도다. 삼성과 일본의 협력은 크게 3단계로 나눌 수 있다는 게 삼성 안팎의 분석이다.

1단계는 사실상 ‘삼성의 일본 배우기’로 정의할 수 있다. 일본의 전성기인 1970년대에 삼성이 전자산업을 시작하던 때 얘기다. 삼성은 이우에 도시오 산요전기 창업자의 조언을 받아 1969년 1월 삼성전자를 설립했다. 이어 그해 12월 산요와 합작해 삼성산요전기(현 삼성전기)를 만들었다. 삼성은 이 합작사를 통해 흑백 TV와 라디오를 생산했고 1970년에는 일본전기(NEC)와 함께 삼성NEC(현 삼성SDI)를 만들어 브라운관을 생산했다. 1973년엔 산요전기와 다시 전자부품 회사인 삼성산요파츠도 설립했다.

1974년부터 삼성은 독자 노선을 걷기 시작했고 일본 기업과의 합작은 한동안 검토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러다 27년 만에 삼성은 다시 한번 NEC와 손을 잡았다.

2001년 삼성SDI와 NEC는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각광받던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삼성NEC모바일디스플레이를 설립했다. 이때부터 일본과 대등한 협력관계가 시작됐다. 삼성은 2004년 3월 NEC와 협력관계를 청산하지만 다음달 바로 소니와 동업을 시작했다. 삼성과 소니는 액정표시장치(LCD)를 제조하는 합작사인 S-LCD를 만들었다. 3조9000억원을 함께 투자했다. 2011년12월 소니와 결별을 선언하면서 삼성과 일본 기업의 2단계 협력관계도 끝이 났다.

3단계 협력은 올 들어 시작됐다. 지난 1월 삼성전자는 갤럭시노트 핵심 부품인 S펜을 만드는 일본 와콤 지분 5%를 샀다. 콧대 높기로 유명한 일본 기업 중 처음으로 삼성전자의 투자를 받았다.

정인설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