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과 일을 통해 모든 세대가 이전 세대보다 잘살 수 있다는 미국 사회의 오랜 믿음이 지금 흔들리고 있습니다.”

2006년 4월 미국의 대표적 싱크탱크인 브루킹스연구소가 펴낸 ‘해밀턴프로젝트’ 보고서의 첫머리다. 가뜩이나 심각한 재정적자를 더 악화시킬 수 있는 사회보장 요구의 확대, 중국에 밀리기 시작한 산업 경쟁력, 효율성 낮은 정부. 초강대국 미국이 속에선 곪고 있다는 경고였다. ‘미국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정책이 필요하다고 보고서는 진단했다. 출발점은 좌절한 중산층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다.

◆초당파적 협력이 필요하다

50여쪽 분량의 이 보고서는 미국 사회에 큰 파장을 몰고 왔다. 공화당과 민주당으로 갈려 ‘성장이냐, 분배냐’를 놓고 이분법적 대립에 빠져 있던 미국 사회는 ‘이데올로기는 잊어라’라는 보고서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중산층 복원을 위해 초당파적 협력을 강조한 것.

표면적으로 보고서 작성은 민주당 성향 인사들이 주도했다. 하지만 월가(미국 금융가) 출신의 로버트 루빈 전 재무장관이 공동저자로 참여했고 학계 재계 등 각계의 의견을 수렴해 정파적 이해관계를 벗어나려고 노력했다. 보고서의 이름에 ‘정부’와 ‘민간부문(시장)’의 균형을 강조한 알렉산더 해밀턴 초대 재무장관의 이름이 붙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7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한국에서 한국경제신문이 해밀턴프로젝트를 다시 들춰본 것도 한국 사회의 미드필더에 해당하는 중산층을 두텁게 하는 데 여야가 따로 없다는 문제의식에서다.

1960년대 경제 개발이 본격화한 이후 한국 사회는 그야말로 역동적이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사회의 맨 꼭대기까지 치고 오르는 성공 사례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었다. 이른바 ‘개천에서 용나는’ 시대였다. 그런 시대가 지금은 저물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제 한국도 중산층 복원의 로드맵을 그릴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한국판 해밀턴프로젝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다.

◆한 명이라도 제대로 끌어올려야

보다 구체적으로는 정책 목표를 분명히 하는 게 시급하다. 전문가들은 ‘중산층 70% 재건’보다는 ‘빈곤층 줄이기’에 먼저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지적한다. 2003년 61%였던 중산층이 요즘 55.5%로 떨어진 것은 무엇보다 빈곤층이 확대된 결과라는 점에서다.

문형표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지금의 복지 시스템은 돈은 돈대로 퍼붓고 빈곤층 가운데 몇 명이나 중산층으로 올라섰는지 모르는 게 현실”이라며 “몇 억원을 들여 몇 명을 지원하는 것보다 몇 명을 빈곤층에서 졸업시키겠다는 식의 목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 명이라도 빈곤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맞춤형 사다리 플랜’을 짤 필요도 있다. 김정근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독일의 실업교육은 맨투맨식(1 대 1)”이라며 “반면 한국의 실업자 교육은 담당자 1명이 수백명을 맡고 있다”고 꼬집었다.

중산층의 도전의식을 높일 안전장치도 시급하다. “자동차가 빨리 달릴 수 있는 것은 브레이크가 있기 때문”(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과 교수)이라는 말이 왜 나오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사회안전망이 잘 갖춰져 있을 때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히 도전할 수 있다는 얘기다.

◆기업들 다시 뛰게 해야

기업가정신을 높이고 불필요한 규제를 완화하는 작업도 빼놓을 수 없는 과제다. 중산층 복원의 관건은 결국 일자리에 달려 있다는 점에서다.

박현수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사회안전망만으로 중산층을 유지하는 것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며 “결국 일자리 확대가 중산층을 늘리는 핵심 열쇠”라고 말했다.

중소기업에 대한 재조명도 필요하다. 중소기업은 국내 근로자의 90% 이상을 고용하고 있지만 정작 청년층은 더럽고, 힘들고, 위험하다는 이유로 중소기업을 ‘3D업종’으로 인식하고 있다. 김동열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중소기업을 청년층이 가고 싶은 3C, 즉 깨끗하고(clean), 창조적이고(creative), 멋진(cool)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인적자원에 대한 투자를 늘리는 ‘휴먼 뉴딜’도 주목할 만하다. 교육은 중산층을 길러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통로다. 정갑영 연세대 총장은 “저소득층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교육”이라고 말했다. 저소득층뿐 아니다. 상시 구조조정 위험에 노출된 직장인이나 정년기에 접어든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의 재취업 문제는 평생 직업교육 체제를 갖추지 않으면 해소하기 어렵다.

김유미/주용석 기자 warmfron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