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기업 오너인 A사장(55)은 회사를 키운 걸 후회한다. 매출 50억원대 중소기업을 10년 만에 500억원대로 성장시켰지만 정부의 각종 자금 및 구매 지원, 세금 감면 등이 끊겨 경영난을 겪고 있다. 지원이 쏟아지던 중소기업 때와 비교하면 사업하기가 100배 이상 어려워졌다고 느낀다. 대기업 반열에 오르면 규제가 더욱 많아질 것을 생각하니 투자나 신사업 개척은 엄두가 나지 않는다. 대기업이 되면 270개 법령에 걸쳐 3400여개 지원(2012년 기준)이 사라진다. 대신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 지정 등 84개 규제(34개 법령)가 새로 생긴다. 여야 정치권이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약속한 경제민주화 관련 규제를 떠올리면 얼마나 많은 장벽이 새로 생겨날지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기업가정신 어디로 갔나

“한국은 내가 방문한 국가 중 모험가적 성향이 가장 큰 나라였다.”(홀로몬 MIT 교수) “기업가정신을 실천하는 데 있어 1등은 단연 한국이었다.”(피터 드러커)

자원 빈국 한국이 기업가정신을 바탕으로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데 따른 찬사다. 일제 강점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형성된 빈곤 탈피 욕망은 산업화 과정의 성공 체험을 통해 자신감으로 바뀌었다. “부존자원도 없는 한국이 세계가 부러워 할 경제성장을 이룩한 배경에는 한국인 특유의 기업가정신이 발현됐기 때문”이라는 평가(김동선 중소기업연구원 원장)가 나올 만하다.

하지만 먹고살 만해지면서 이런 한국 고유의 DNA가 사라졌다. 중소기업은 각종 정부 지원과 혜택의 우산 속에 안주하려 들고 대기업은 사회 양극화의 주범으로 내몰려 ‘공공의 적’이 되다시피했다. 여기에는 기업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이중적인 인식도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다. “해외에서는 수출 대기업 제품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국내에서는 평가절하하고, 중소기업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고 하면서 정작 중기 제품이나 서비스는 신뢰하지 않는다.”(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

○중견·대기업 되기 겁난다

황인학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4년 전 중소기업이 중견·대기업으로 성장하기를 꺼리는 현상을 빗대 ‘피터팬 신드롬’으로 처음 명명한 인물이다. 그는 “기업가정신은 기존 방식을 혁신해 생산성과 부가가치를 높이는 방법을 개척하는 것으로 무(無)에서 산업을 만들어낸 대한민국 창업 1세대의 정신”이라고 정의했다. 이어 “저성장과 일자리 감소 문제를 해결하고 중진국 함정에 빠져들지 않는 유일한 탈출구”라고 설명했다.

능력과 기회가 있는데도 중소기업으로 남기 위해 애쓰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잘못된 기업 정책 탓이 크다는 게 황 연구위원을 비롯한 상당수 전문가들의 견해다. 중소기업일 때 지나친 지원과 보호를 받다 대기업에 오르면 비판과 규제의 대상이 되는 모순이 기업가정신을 왜곡시켰다는 지적이다.

올해 정부의 중소기업 공공구매 지원 목표는 71조원(작년 68조원)에 이른다. 중소기업 지원 제도에 따른 각종 보증, 융자, 공공구매,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 지원 등으로 지난해 150조원이 쓰였다. 중소기업청 소관 금융·판로 지원 제도는 160여개, 141조원에 육박한다. 중소기업 전체 매출 513조원(2010년 중기청 조사)의 30%를 차지한다. 가업을 잇는 중소기업은 상속세를 70% 감면받아 ‘부의 대물림’에서도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업종 전문화를 통해 성장한 중견·대기업들이 중소기업 적합업종 제도로 타격받는 것과 대비된다. 30년간 두부사업으로 커온 풀무원, 장류 전문기업 샘표, 국내 커피 시장을 개척한 동서식품, 친환경 제품 개발 및 투자 확대를 추진했던 일진전기 등이 주력 사업 일부 철수 및 축소, 확장 자제 권고를 받았다. 한국중견기업연합회 조사에 따르면 적합업종 제도로 규제를 받는 중견기업은 137곳에 이른다.

○과잉 보호의 역설…성장 기피증

1997년 당시 중소·중견기업 가운데 대기업으로 성장한 곳은 풍산 오뚜기 이랜드 3곳 정도다. 한국의 기업 생태계를 보면 중소기업은 지나치게 많고 중견기업은 적으며, 대기업은 드문 ‘압정형’ 구조다. 소상공인(광업·제조업·건설업·운수업은 상시 근로자 10명, 나머지는 5명 미만)이 87.9%(2010년 기준)로 가장 많다. 중소기업은 12%, 중견기업과 대기업은 각각 0.04% 수준이다. 미국 독일 일본 영국 등 선진국은 우리보다 대기업이 많고 소기업이 적다. ‘9988’은 ‘전체 기업의 99%에 이르는 중소기업이 일자리의 88%를 만들어낸다’는 의미로 쓰인다. 하지만 실상은 ‘1249’다. 소상공인을 뺀 순수 중소기업은 12%, 고용인원은 49%다.

중소기업에서 중견기업만 돼도 많은 족쇄가 채워진다. 공공구매 시장에 거의 참여하지 못하고 중기 적합업종 제도에 따른 규제도 받는다.

이렇다 보니 어떻게 해서든 중소기업으로 남기 위해 갖은 편법을 동원한다. B사는 2010년 중견기업으로 분류돼 공공조달 시장 참여가 불가능해지자 자회사를 설립해 시장에 참여, 논란이 일기도 했다. 박양균 중견기업연합회 조사기획팀장은 “상당수 기업이 중소기업 지위를 잃지 않으려고 기업 쪼개기를 시도하거나 일부러 직원을 줄이는 등 문제가 심각하다”며 “중소기업을 과잉 보호하는 제도 탓에 기업가정신이 위축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건호 기자 leekh@hankyung.com

■ 대·중소기업 분류 기준

○대기업

공정거래법에 따라 상호출자를 제한받는 연 매출 5조원 이상의 기업집단 및 그 계열사

○중견기업

산업발전법상 일정 요건을 충족하는 대기업이 아닌 중간 규모 기업. 중소기업의 업종별 규모 기준을 초과하거나 질적 기준(상시 근로자 1000명, 3년 평균 매출액 1500억원, 자기자본 1000억원) 중 하나 이상의 요건을 충족하는 기업

○중소기업

중소기업기본법에 따라 국가의 보호를 받는 영리 기업. 업종에 따라 상시 근로자 100~300명, 매출액 200억~300억원, 자본금 30억~80억원 이하이거나 중견기업의 질적 기준을 초과하지 않는 기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