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후 사업을 생각해라(Think of further business).”한 협력업체가 애플에 재고 물량을 보상해줄 것을 요구한 뒤 들은 대답이다. 애플 측 수요 예측이 틀려 생긴 재고지만 가져가지 않는다. 다른 곳에 팔려해도 팔 수 없다. 아이패드에만 쓰이는 부품인데다 애플이 다른 곳에 파는 것을 금지해서다. 짝퉁(모조품)이 생긴다는 논리다. 납품을 계속하려면 협력사가 ‘땡처리’도 못하고 손실로 떠안을 수밖에 없다.

애플이 협력사에 내미는 납품계약서가 논란이 되고 있다. 재고 부담 등 독소조항이 상당수 포함돼 있어서다. 글로벌 전자부품 시장의 가장 큰 손인 애플에 납품하려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진다’는 게 업계의 주장이다.

본지 취재 결과 애플의 계약서엔 ‘재고는 다른 곳에 팔 수 없다’ ‘신기술로 만든 부품은 1년간 다른 경쟁사에 판매해선 안된다’ ‘초기 기획한 가격보다 납품가가 낮아야 한다’는 등의 조항이 들어있었다. 발각되면 각국 경쟁당국이 나설 만한 내용이다.

애플은 계약서를 맺을 때 ‘입을 다물라’는 비밀유지(NDA) 조항까지 넣어 협력사에 재갈을 물린다. 비밀이 새나가면 거래를 끊거나 클레임(claim·거래위반)을 걸어 수백만~수천만달러를 회수한다.

◆파괴된 부품 생태계…애플에 종속

2007년 애플이 아이폰을 선보인 뒤 글로벌 정보기술(IT) 생태계는 대지각변동을 겪고 있다. 피처폰(일반 휴대폰)이 스마트폰으로 바뀌고, 노트북과 PC를 태블릿이 대체하면서 애플과 삼성전자가 양강으로 부상한 반면 휴렛팩커드(HP) 델 노키아 모토로라 소니 등은 매출이 고꾸라졌다.

삼성전자는 수직계열화된 기업이다. 반도체 디스플레이 배터리 등을 내부와 계열사에서 조달한다. 글로벌 부품 시장엔 애플만 큰 손으로 남았다는 얘기다. 이는 숫자로

확인된다. 시장조사업체 아이서플라이에 따르면 올해 애플의 반도체 구매액은 시장의 28%인 270억달러다. 시장의 4분의 1 이상을 사들인다. 애플의 구매액은 2009년 90억달러에서 2010년 160억달러로, 2011년엔 230억달러로 매년 급증했다.

디스플레이 시장에서도 애플은 절대적이다. 지난 3분기 스마트폰·태블릿용 디스플레이 시장은 84억달러 규모였는데 이 중 애플이 31억달러(37%)어치를 사들였다. 이 같은 현상은 배터리, 회로기판, 적층세라믹콘덴서(MLCC) 등 모든 전자부품에서 발견된다.

◆슈퍼갑 애플 불공정 거래 강요

‘슈퍼갑’이 된 애플과 납품 협상을 하면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 협력사엔 이익 여부를 떠나 죽느냐, 사느냐는 문제여서다. 애플이 넣는 대표적인 독소조항이 ‘재고를 다른 데 팔 수 없다’는 것이다. 디스플레이를 예로 들자. 애플은 독특한 패널 크기를 고집한다. 대부분의 태블릿이 10.1인치지만 아이패드는 9.7인치다. 아이폰도 3.5인치, 4인치 등 경쟁사와 다르며 아이팟도 MP3 업계가 2인치, 3인치를 범용으로 쓸 때 1.46인치, 2.46인치를 사용했다. 혁신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문제는 이 같은 제품의 재고가 남으면 협력사가 책임져야 한다는 점이다. 독특한 크기여서 애플 외에 팔 수 있는 곳이 거의 없는데다, 계약서에서 다른 곳에 파는 걸 금지한다. 최근 부품 조달 차질로 몇 차례 제품 생산이 지연된 게 이 때문이란 주장도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애플이 재고를 책임져 주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수요예측에 의존하지 않고 최종 주문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고 말했다.

신기술로 만든 부품은 1년간 다른 업체에 팔아선 안된다는 조항도 있다. 신기술을 독점하려는 의도다. 업계 관계자는 “협력사가 어렵게 신기술을 개발하면 많은 매출을 올려야하는 데, ‘슈퍼갑’ 애플에 밀려 애플이든, 다른 업체든 양자택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쟁당국에 고발하려 해도 ‘공급 여부와 공급가, 수량 등을 비밀로 해야 한다’란 비밀유지 조항 때문에 어렵다. 위약금을 내야할 뿐 아니라 애플과 다신 거래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 일본에선 300억원의 위약금을 물어낸 사례가 있다고 한다. 애플의 비밀주의는 수년간 협력사 명단조차 공개하지 않은 데서 확인된다. 지난해 말 협력업체 폭스콘이 미성년자 노동으로 적발되면서 인권단체들이 강하게 압박하고 나서야 애플은 156개 협력사 명단을 밝혔다.

◆최저가 최저가 최저가…

애플은 계약서에서 최저가 납품을 몇 차례나 강조한다. ‘다른 곳에 주는 가격보다 낮아야 한다’ ‘업계 최저가여야 한다’ ‘수요예측 때 기획했던 값보다 낮아야 한다’는 등의 여러 조건을 삽입해 협력사를 옭아맨다.

부품업계는 처음 기획가보다 낮아야 한다는 조항에 특히 반발한다. 이는 애플이 납품 여부를 타진했을 때 협력사가 추정해 써낸 가격보다 실제 공급가가 높을 수 없다는 뜻이다. 개발과정에서 부품·소재가 바뀌거나, 원자재 값이 오르면 협력사가 떠안아야 한다. 지난 5월 유장희 동반성장위원장이 ‘동반성장의 모범사례’로 언급했던 애플의 실상이라고 업계는 지적한다. 업계 관계자는 “업계 최저가여야 한다는 조항도 신기술 개발 대가를 주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본 샤프는 아이패드 패널용으로 개발해온 ‘산화물 반도체(IGZO)’ 디스플레이 패널을 HP 델에 공급키로 계약했다. 애플은 샤프만 만들 수 있는 이 제품을 받으면 협상력이 떨어져 값을 깎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