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기마다 가격을 낮춘다. 계약을 갱신할 때마다 비밀유지 독점공급 등 각종 조건이 늘고, 서명하지 않으면 공급선에서 빼기도 한다. 분기가 지나면 가져가지 않은 재고에도 낮아진 새 가격을 적용한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보면 다 걸릴 사안이지만 위약금이 수십억~수백억원에 달하는 비밀유지조항(NDA) 때문에 밝힐 수도 없다.”

국내 한 부품회사 사장이 애플 납품의 ‘비밀’에 대해 털어놓은 얘기이다. 애플이 수년째 영업이익률 30%대를 질주 중이지만 협력사들의 실적은 악화일로다. 애플이 단가를 계속 낮추기 때문이란 게 부품사들의 설명이다. 납품을 거부하고 싶어도 글로벌 IT(정보기술)업계를 석권한 애플 외엔 대규모 주문을 늘리는 곳이 없어 불가능하다.

○애플에 납품하면 적자

지난 7월 메모리 업계엔 ‘애플에 납품하면 적자’란 괴담이 돌았다. 애플이 압도적 구매력과 어려운 시장 상황을 활용해 이익을 낼 수 없는 수준의 낮은 가격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괴담은 사실로 드러났다. 애플에 납품한 마이크론(8월 결산법인)은 지난 4분기(6~8월)에 전년 동기보다 8.2% 감소한 19억6300만달러의 매출과 3배 가까이 늘어난 1억4000만달러의 영업적자를 냈다. SK하이닉스는 3분기 매출 2조4230억원, 영업손실 150억원으로 적자 전환했으며 도시바는 7~9월 낸드 사업에서 28억엔의 적자(메릴린치 추정)가 예상되고 있다.

애플에 저가로 대량 공급한 게 주요 원인으로 분석된다. 시장조사업체 아이서플라이는 최근 아이폰5를 분해한 결과 메모리칩 원가가 20.85달러로 아이폰4S의 28.30달러에 비해 26.3%(7.45달러)나 떨어졌다고 발표했다. 반면 애플에 메모리를 공급하지 않은 삼성전자는 3분기 메모리 사업에서 매출 5조2200억원, 영업이익 7000억원 이상을 냈다.

아이서플라이에 따르면 올해 애플의 반도체 구매액은 전체 시장의 28%로 지난해(24.3%)보다 크게 늘 것으로 예측된다. 한 애널리스트는 “자체 갤럭시폰 수요가 있는 삼성을 빼면 다른 메모리 회사는 애플 없이는 매출 성장이 불가능하다”고 진단했다.

디스플레이 업계도 마찬가지다. 애플 공급량을 늘려온 LG디스플레이는 3분기 영업이익률이 3.3%에 그쳤다. 샤프는 수백억엔대 적자가 예상된다. 반면 삼성디스플레이는 12%의 영업이익률을 기록했다. 시장조사업체 디스플레이서치에 따르면 삼성의 아이패드 패널 공급량은 지난 5월 288만대에서 8월 63만대로 줄었다. 대신 LG디스플레이는 지난 5월 255만대에서 8월엔 382만대로 증가했다. 애플이 삼성에 대한 주문을 축소해서다.

○아이폰, 부품값은 판매가의 27%

미국 버클리대는 지난해 아이폰의 제조 원가가 판매가의 27.2%에 불과하다는 분석을 내놨다. 아이폰5는 아이폰4S보다 액정이 커지고 성능이 개선된 부품이 들어갔으나 원가는 예측과 달리 고작 대당 9달러 높아지는데 그쳤다. 부품 단가 인하가 상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애플이 ‘가격 후려치기’를 하는 방법은 세 가지다.

한 가지 부품에 2~3개 공급사를 두는 ‘멀티벤더’ 전략이 첫 번째다.공급사가 한 개뿐인 경우 협상력이 떨어져서다. 한 공급사 관계자는 “그동안 전체 부품량의 30%를 담당해왔는데, 이를 50%로 높여주겠다며 추가 인하를 요구해왔다”며 “업계를 탐문해보니 경쟁사에도 비슷한 제안을 했더라”고 전했다.

두 번째 이렇게 책정된 값을 부품을 공급할 때 한 번 더 깎는다. ODM 파트너인 폭스콘 등을 통해서다. 애플과 가격협상이 끝나면 실제 주문과 결제는 폭스콘이 하는데 이때 추가 인하를 요구받는다.

세 번째는 기술 평준화를 통한 단가 인하다. 애플은 관리비용을 줄이려고 2~3개 부품사에서 똑같은 부품을 받기를 원한다. 이를 위해 기술이 앞선 납품사의 도면 등을 다른 경쟁사에 주기도 한다. 납품사들의 기술 수준이 같아지면 애플은 납품업체 간 경쟁을 유도해 더 많은 인하폭을 끌어낼 수 있다.

한 부품사 고위 관계자는 “애플은 멀티벤더를 유지하기 위해 어려운 협력사에 선수금을 주거나 많은 주문을 주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지난 2월 파산한 일본 엘피다는 애플 주문이 늘어 가동률이 높아졌다.

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