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죽이지 못하는 시련은 더 강하게 만들어 줄 뿐’이라고 니체는 꿰뚫었다. 삶의 본질을 관조한 초인(超人)의 이 사유는 이후 수없이 인용되고 있다. 1998년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방한, 외환위기를 ‘위장된 축복’이라 표현한 것도 니체를 빌린 변주였을 것이다. 당시 구조조정이라는 엄혹한 시련을 맞은 국민들은 캉드쉬의 발언에 ‘무슨 소리지’라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이제는 공감이 커졌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기업 금융 노동 공공부문 개혁이 본격화되고, 글로벌시장에도 눈 떠 경제전반이 업그레이드됐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현대차 등이 일류로 발돋움했고, 국가신용등급은 일본을 추월하는 새 역사를 썼다. 몰라보게 강해진 스스로의 모습에 놀라고 뿌듯해진 적도 여러 번이다.

후진성 드러난 기업·금융

하지만 기습적인 법정관리 신청 후 한 달을 맞은 웅진사태를 지켜보노라면 한때의 우쭐함이 어쭙잖은 감정과잉이었음을 절감하게 된다. 문어발 확장, 과도한 부채, 불안한 2세 경영, 엉성한 금융시스템 등의 부정적 유산이 여전히 한국 기업을 포위 중임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윤석금 웅진 회장은 책 외판원으로 출발해 재계 30위권 기업을 일군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이다. 그런 그마저 최근 5년 새 태양광, 건설, 저축은행 등으로 무차별 확장, 지난 세기의 문어발식 성장 패러다임을 답습하고 말았다.

부채 의존전략도 변하지 않았다. 웅진의 차입금은 4조3000억원(2011년 말)으로 2년 만에 세 배가 됐다. ‘부채의 빠른 증권화’도 문제다. 은행 대출은 대거 기업어음(CP)으로 대체되고, 자산담보부기업어음(ABCP)처럼 복잡한 금융기법이 속속 동원됐다. 증권화는 위험을 분산하고 쉽게 돈을 빌리는 마법처럼 보이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증권화된 빚은 조금만 불안해도 투자자들의 가차없는 상환요구에 직면한다.

또 ‘2세 승계’가 한국기업들의 아킬레스건임이 재차 입증됐다. 30대 두 아들로의 경영권 승계구상이 윤 회장이 무리수를 둔 배경으로 거론된다. 경험이 일천한 컨설턴트 출신 30~40대 젊은 경영자들의 질주 역시 외환위기 이후의 실패담에 감초처럼 등장하는 메뉴다. 이들은 결정적인 대목마다 자신의 이익만 챙기는 ‘막장 경영’을 적잖게 보여줬다.

금융시스템의 후진성도 확인된다. 은행들은 ‘웅진이 계속 뒤통수를 친다’며 분개하지만, 기업 회생보다 채권 회수에만 골몰한 자업자득의 측면이 크다. 증권사들은 수수료 욕심에 회사채 CP 등을 엄격한 위험분석없이 고객들에게 권했다. 신뢰를 먹고 사는 금융회사라기보다 금융브로커 같은 행태다.

경제시스템 건강상태 점검을

허술한 감시망도 힘을 빠지게 한다. 무엇보다 눈가림식 감독행정이 그대로다. 정부는 시장질서를 바로잡겠다며 웅진의 불법을 강도높게 조사 중이다.

하지만 속내는 따로 있다. 대선국면에서 이런저런 부실을 덮고 가려는 ‘관리 모드’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게 격앙된 반응의 이유다. 외환위기 후 지급보증이 엄격히 규제됐는데도 집단도산 위기에 처한 데 대한 반성은 없다. 무리한 의사결정에 반대 목소리를 내지 못한 사외이사들의 무책임한 태도 역시 변함없다.

웅진홀딩스와 극동건설의 법정관리가 허용돼 이제 공은 법원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마지막 수비수가 돼야 할 법원마저 전문성이나 신뢰도가 바닥권이라는 점에서 걱정은 가시지 않는다. 웅진사태 한 달은 한국 경제의 시스템이 건강한지, 시련 속에 단련되며 진정 더 강해지고 있는지를 심각하게 묻고 있다.

백광엽 금융부 차장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