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각 대성하이텍 대표(56)는 올해 상복이 터졌다. 대구 성서공단에서 정밀공작기계 부품과 완제품을 생산하고 있는 그는 지난 23일 서울 삼성동 그랜드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한국무역협회와 지식경제부, 한국경제신문이 공동 시상하는 ‘한국을 빛낸 올해의 무역인상’을 받았다. 앞서 지난 11일 ‘제48회 무역의 날’엔 ‘3000만불 수출의 탑’을, 지난 1월엔 ‘이달의 무역인상’을 각각 받았다. 기업인으로서 평생 한 번 받기도 힘든 큰 상들을 1년에 세 차례나 받았다.

그는 수입 기계부품을 국산화한 뒤 일본 등 해외에 역수출해 대일(對日) 무역역조를 크게 개선한 성과를 인정받았다. 최 대표가 1995년 설립한 대성하이텍은 직원 195명에 매출 500억원(올해 추정치)을 올리는 경북 지역 내 대표적인 강소(强小)기업으로 꼽힌다. 이 회사는 정밀기계, 반도체장비, 인쇄기, 철강기계 등에 쓰이는 부품과 유닛(반완제품), 정밀기계 완제품 등을 생산해 이 중 98%를 해외에 수출한다. 국내 대부분 제조업체들이 기계 부품을 해외에서 수입하는 것과 다르다. 특히 생산량의 75% 이상을 일본에 수출한다.

어떻게 한국의 취약 부문인 정밀기계 쪽에서 그런 성과를 낼 수 있었을까. 지난 23일 시상식에 앞서 서울 삼성동 무역센터 지하 1층 비즈니스센터에서 최 대표를 만났다. 그는 약속시간 30분 전에 미리 도착해 인터뷰를 준비하는 치밀함을 보여줬다. 그 때문일까. 인터뷰는 웃음이 그치지 않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두 시간 넘게 진행됐다. 그는 성공의 비결로 ‘도전정신’과 ‘품질관리’ ‘꾸준한 독서’를 꼽았다.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올해 상을 많이 받으셨는데, 원래 상복이 많은 편입니까.

“웬걸요. 지금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지만, 1995년에 대성정밀(대성하이텍의 옛이름)을 설립하고 처음으로 일본 시장을 두드렸을 때만 해도 말도 못하게 힘들었어요. 일본 사람들이 한국 부품업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더라고요. 2년 동안 일본에서 열리는 온갖 상담회 전시회를 다 찾아다니며 부품을 만들어준다고 했지만, 답을 주는 곳은 한 곳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KOTRA에서 일본의 기계금속기업 책자를 만들었는데 거기에 기업체 이름과 주소, 전화번호, 부품조달 담당자 이름, 한국과의 거래희망 여부 등이 일목요연하게 적혀 있더군요. 500개 기업 중에 200개를 골라 직접 편지를 썼죠. 그 중 두 개 기업이 답장을 했고, 한 개 기업이 도면을 보내줬어요. 하늘이 열리는 기분이었죠.”

▶그때부터 수출길이 열렸나요.

“천만에요. 바이어가 대구로 날아와서 4박5일 동안 머물며 생산현장을 검사한 뒤 3000만원짜리 오더를 줬어요. ‘이제 됐다’ 싶어 덥석 달려들었는데 일본 사람들 까다롭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처음 심사에서 불량률이 50% 나왔어요. 도면대로 안 나왔다고 퇴짜 놓고, 다시 퇴짜 놓고…. 끝없이 제품 수정을 요구하는 바람에 회사 내부에서는 “이러면 수익 내기 힘들다. 그만두자”는 얘기까지 나왔어요. 이를 악물었죠. 결국 납품했고, 그때부터 길이 열리기 시작했어요. 그뒤 일본 최대 공작기계 제조업체인 야마자키 마작에서 주문을 받았습니다. 혼신의 힘을 다했죠. 그 덕에 지금 야마자키는 저희 매출의 25%를 차지하는 가장 큰 고객이 됐습니다. ”

▶처음부터 해외시장을 공략했습니까.

“아니죠. 첫 직장인 금성통신(LG전자의 전신)에서 야간 실업고에 다니면서 기능올림픽에서 우승했어요. 회사에서도 독일 쪽 공작기계 기술을 열심히 배웠죠. 그래서 1983년 과감하게 독립해서 유일정밀기계를 설립했습니다. 그땐 국내 대기업과 거래를 했어요. 품질만 우수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엔지니어 출신의 한계였죠. 대기업과의 거래관행을 몰랐어요. 국내에서는 원재료값과 인건비가 오르는데 대기업 납품가는 오히려 계속 떨어졌어요. 인력들은 대기업으로 빠져나가고…. 버티다 버티다 5년 만에 10억원의 빚을 지고 회사를 접었어요. 뼈아픈 경험이었죠. 삼성엔지니어링에 들어가서 5년 동안 근무하며 절치부심했고, 다시 대성정밀을 설립해 독립할 때는 자연스럽게 해외시장을 보게 됐어요. 해외시장 개척은 처음엔 어렵지만 한번 성공하면 대금 결제나 재고부담이 없고 물량도 많기 때문에 회사 성장에 큰 도움이 돼요.”

▶2009년까지만 해도 100% 해외수출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해외시장을 뚫으려는 기업들에 조언을 한다면.

“가장 중요한 건 역시 품질입니다. 저희 회사는 8000여개 아이템을 생산하고 있습니다. 다품종 소량 생산시스템이죠. 올해 전체 매출이 500억원 정도 합니다. 소규모 중소기업이 이 만한 아이템을 생산하는 예는 없습니다. 그만큼 품질관리를 철저히 하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공장에 ‘최고의 품질만이 미래를 보장한다’고 크게 써붙였습니다. 그 다음 중요한 게 ‘멘토(mentor)’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일본 시장을 개척할 때부터 현지 퇴직기술자 세 분을 영입해 일본의 정밀기술과 노하우를 배웠습니다. 품질관리뿐 아니라 일본과 새로 거래를 틀 때, 이후 신뢰관계를 이어갈 때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사업은 혼자하기 힘듭니다. 여러 사람, 특히 그 분야에서 경험이 있는 분들의 노하우를 배우는 게 실패 확률을 줄이는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를 더 꼽으라면 독서를 꼽고 싶어요. 항상 공부하는 자세가 있어야 사업에서 성공할 수 있습니다. 직원들에게도 독서를 장려합니다. 도서구입비 전액을 지원하고, 한 달에 한 번 독서포럼을 열어 정기적으로 발표회도 갖고 있죠.”

▶정밀 가공기계와 완전히 다른 생활용품 ‘애니락’도 출시하셨죠.

“제가 원래 발명에 관심이 많습니다. 2002년 한 기업인 모임에 나갔는데, 전기업체를 운영하는 분이 밀봉에 관한 아이디어를 주시더군요. ‘아, 이건 된다’는 감이 왔죠. 곧바로 아이디어를 돈을 주고 샀어요. 곧장 개발에 들어가 2005년에 내놓은 게 ‘애니락(AnyLock)’입니다. 어떤 비닐이라도 끝 부분을 한 번 접고 홈 사이에 끼워 넣기만 하면 완벽에 가깝게 밀폐·방수가 됩니다. ‘세계일류상품’으로 선정됐고 독일 일본 등 세계 25개국에 수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성공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앞으로 10년 내 100개국에서 70억개 이상 판매한다는 목표를 이뤄야죠.”

▶사업 다각화에 관심이 많은 것 같습니다.

“부품과 반제품, 완성품 부문에서 각각 3분의 1의 매출을 올리도록 포트폴리오를 짜고 있습니다. 특히 완성품 분야에 신경 쓰고 있는데, 애니락과 제로인(Zero-in) 같은 우리 브랜드 제품을 많이 만들어낼 계획입니다. 제로인은 지식경제부 국책과제로 선정돼 지난해 세계 최초로 개발한 5축가공이 가능한 초소형·고속·고정밀도 가공기계입니다. 반응이 좋아서 곧 양산체제에 들어갑니다. 의료기기 쪽과 그린에너지 장비 쪽에도 국산화하기 위해 기술개발에 힘쓰고 있고요.”

▶자본 확충을 위해 상장할 계획은 없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2013년께 상장한다는 계획을 세워 놓고 있습니다. 주위에선 “뭐하러 상장하느냐. 주주들이 경영에 개입해서 귀찮다”는 의견도 내지만 100년, 1000년 기업을 만들기 위해서는 역시 인력과 자금이 필요하다는 게 제 결론입니다. 특히 당장 내년부터 현대위아에 자동선반기계를 ODM(제조업자개발생산ㆍ단순 생산이 아닌 판매업자가 요구하는 기술을 자체 개발해서 납품하는 방식)으로 공급하는데 공장도 지어야 하고, 앞으로 다른 분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우수 인력도 영입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돈이 많이 필요합니다. 몇몇 기관투자가들에 의향을 물었는데, 상당히 반응이 좋았고요. 기업공개에 앞서 투자를 먼저 받을 생각도 하고 있습니다.”

■ 최우각 대표는 20세때 전국기능올림픽 우승…4전5기 '오뚝이' 사업가

최 대표의 부인 박경남 씨(55)는 “남편 고집이 말도 못하게 세다”고 말했다. 최 대표도 “내 이름이 우각(牛角), 쇠뿔 아니냐. 밀어붙이는 데는 일가견이 있다”고 맞장구쳤다.

가난을 이기고 성공하겠다는 고집은 자수성가의 원동력이 됐다. 충북 충주에서 2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7살 때 부친을 여의고 9살 때 고모집에 맡겨졌다. 충주중학교를 졸업한 뒤 충주고등학교에 입학했지만, 2학년을 미처 끝내지 못했다. 17살 때 금성통신(LG전자의 전신)에 취직했고, 회사에 다니며 야간으로 동광실업고를 겨우 졸업했다. 실업고 시절 그는 전국기능올림픽 정밀기계 제작 분야에서 우승했다. 회사 퇴직 후엔 땀이 안 차는 방석을 개발하고 에어백 장사를 하는 등 다른 분야에 도전, 창업했지만 네 번이나 실패했다. 그는 뭘하든 뿌리를 뽑는 성격이다. 골프도 그렇다. 15년 구력의 싱글 핸디캡으로, 얼마 전 1언더파까지 쳐봤다고 한다.

박수진 기자 psj@hankyung.com